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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왜 주의 사자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나타났는가?

왜 주의 사자는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렸을까? 흔히 랍비들은 말하기를, 성경에 기록된 글자 하나 하나에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의 사자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예수 탄생 소식을 전한 것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먼저, 성경과 미쉬나의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창 35:21)
  2. 너 양 떼의 망대 (에델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미 4:8)
  3.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 2:4-6) 


1번과 2번에 나오는 에델 망대 (Migdal Eder)는 양떼들을 보호하는 망대이다. 그렇다면 어떤 양떼들을 보호하는 망대일까? 미쉬나에 의하면, 성경 시대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에 바치는 양떼들을 특별 관리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베들레헴에 있는 에델 망대이며 그 양떼들을 관리하는 목자들 역시 일반 목자들이 아닌 희생 제물이 될 양떼들을 관리하는 특별한 목자들이었다. 또한 미쉬나에 의하면 메시야가 첫번째 오시는 곳 역시 목자들이 희생 제물이 될 양들을 사육하는 에델 망대로 오실 것이라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미쉬나의 전통을 무조건 수용할 수는 없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면, 이 전통이 유효한 것이지만 성경에 근거가 없다면 미쉬나의 전통을 수용할 이유가 없다. 


그럼 성경에서는 메시야가 에델 망대에서 출생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메시야의 탄생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미가서 5:2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베들레헴에 있는 에델 망대에서의 탄생은 언급하지 않았다. Afred Edersheim은 그의 책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186- 187,” 에서 미쉬나의 전통을 근거로 예수께서 탄생한 장소는 에델 망대, 즉 희생 제물로 드리는 양들의 우리에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희생양으로 메시야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매우 은혜스런 해석은 될수 있겠으나, 성경적인 근거는 부족하다. 


만일 눅 2:7에서 언급한 대로 “객실에 공간이 없어” 라는 표현이나,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배제하고, 더 나아가 베들레헴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친족들이 출산 직전의 마리아를 문전 박대하였다면 그래서 어쩔수 없이 양떼의 망대속에 들어가서 출산을 하였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미쉬나에 언급된대로 양떼의 망대가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양떼들을 특별 관리하는 망대였다면 그 장소에서 마리아가 출산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레위기법에 의하면 여자의 출산을  월경때와 같이 일시적으로 부정해지는 기간으로 규정 (레 12:2)하기 때문에,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양떼들이 머무는 망대에서의 출산은, 그 출산 과정에서 흘리는 피로 인해 망대 자체가 부정하게 된다. 또한, 에델 망대가 마을 안쪽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다. 만일 마을 안쪽에 에델 망대가 있었다면, 희생 제물로 드리는 양들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목양의 특성상 마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광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진: 망대


목자들이 모두 앙떼를 지키고 있었기에,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인 망대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역시 가능하지 않은 추정에 불과하다. 눅 2:17 - 18을 보면,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메시야를 만나 천사가 자기들에게 고한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을 기이히 여겼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에델 망대에서 출생하였다면, 그 자리에서 “듣는 자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분명 목자들은 아닐 것이며, 베들레헴의 거주민, 혹은 마리아와 요셉의 친족들이었을 것인데 그들이 에델 망대로까지 가서 마리아의 출산을 지켜보았다고 말할수는 없는 것이다. 친족들이 에델 망대로 가려 했다면, 차라리 마리아가 머물던 집의 객실을 비워주었으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주의 사자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렸을까? 만일 그 목자들이 에델 망대의 목자들이었다면, 주의 사자가 전한 그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면서도 가장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초림에 대한 깊고도 큰, 그리고 지치지 않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는 쿰란 문서와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대망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목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특별히 그들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양떼들을 관리하는 목자들이었다면, 그들 스스로가 진정한 희생양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를 주의 사자의 말을 통해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하였다 (성경에는 그들의 희생양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알았다는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성경 기자는 훗날 이 메시야 탄생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에델 망대와 목자들, 그리고 희생양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연관성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이 추정은 단순히 사건을 연결시켜서 억지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성경의 사건을 신약 성경 저자가 인용하는 것을 보면, 구약 성경 본문의 상황과 맞지 않게 해석 및 적용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본 글에서 그런 예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는 없다. 구약의 예언들 중에는 그 본문과 역사적 상황 (Text and its historical context)속에서 예언의 1차 성취, 그리고 신약 성경 본문의 인용과 적용 그리고 성취라는 이중 성취 (Double fulfillment)로 해석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또한 성경의 예언이 그 예언을 첫번째로 듣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였다고 볼수는 없다. 창 22장에 나오는 이삭 대신에 숫양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기독론적으로 볼때 훗날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숫양을 대신 바치면서 훗날 메시야가 그렇게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에델 망대의 목자들이 주의 사자의 메시지를 듣고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를 만났지만 그 예수께서 희생양으로 오셨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메시야의 죽음을 보았던 사람들, 그리고 성경의 독자들은 그때 에델 망대의 목자들이 만난 아기 예수는 희생양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 탄생 후 약 30년이 지난 후에 세례 요한은 그 옛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 1:29) 되심을 알아보는 눈이 열렸다. 베들레헴의 에델 망대에서 희생양으로 드려질 양들을 지키고 관리하는 목자들...그들이 주의 사자로부터 들었던”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메시야) 주시니라” 라는 복음서의 글을 읽는 오늘날의 독자는 그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당신들이 만났던 예수는, 당신들이 키우던 희생양, 제단에 피를 뿌리는 희생양,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 당하는 그 어린양들로 씻을 수 없는 당신과 나의 죄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속하신 “세상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