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ublic Diary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의 탄생일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들과 초대 교회의 문서들은 침묵을 지킨다. 적어도 주후 200년까지 기록된 성서와 관련된 기독 문서들, 예를 들면 외경이나 교부(The Church Fathers)들의 글은 예수의 탄생일에 대한 언급도 없고 절기로 지켰다는 기록도 없다. 주후 3세기로 접어들면서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탄생일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한 듯 하다. 그러면서 탄생일에 대한 추정을 하게 되고 12 25일 혹은 1 6일을 탄생일로 지키게 되었다. 성서와 주변 문서의 기록이 없는데 무슨 근거로? 흔히 알려진 설인 12 25일은 로마 태양신의 절기인데, 이 날을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탄생일로 정했다는것이다. 왜 하필이면 태양신의 절기인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줄만한 정확한 답은 없다. 다만, 어떤 자료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의 세력이 약할 당시 이방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신들의 탄생 절기를 지키는 풍습이 있었다. 예수의 탄생일 제정은 이방인들이 기독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선교 전략으로 탄생일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예수의 탄생월을 12월로 정한것은 유대 절기인 유월절 (대략 3-4월경)에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후에 임신을 하여 12월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관해라는 글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를 3 25일날 임신하였고 동일한 날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다 라는 전통에 근거해서 예수께서는 12 25일날 탄생하셨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 두번째 설은 고대 랍비 문학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니산월 (유월절이 있는 달)에 세상이 창조되었고,  이 니산월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태어났으며, 이삭은 유월절에 태어났다.  게다가, 훗날 유월절 기간에 구속의 사건이 있을 것이다 라는 전통이 있었다. 이것을 교회에서 받아들여 예수의 탄생일을 추정하였을 수도 있다.

         딱딱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이스라엘에서는 성탄절을 어떻게 지키고 있을까? 늘 이런 저런 사건 사고로 주목받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 성탄절은 없다. 길거리 어디에서도 그 흔한 케롤송을 들을 수 없다. 예수 대신 주인공 자리를 완벽하게  꿰찬 산타의 모습과 그의 리무진 기사 붉은코 루둘프도 없다. 물론 베들레헴은 다르다. 성탄 기간이 되면 전세계에서 기독교인들로 베들레헴으로 몰려든다. 작년 이스라엘 관광성 보고에 의하면 성탄 기간 동안 약 9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할 것이라는 뉴스가 있기도 했다. 성탄절은 이스라엘이 짭짤한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고,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게도 성탄절은 한몫 잡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종교인들은 성탄 기간이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독교와,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우두머리인 예수는 그들의 적이기 때문이다. 호텔들과 식당에서는 성탄 분위기를 만들어보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작년에는 종교인들이 공공연하게 경고를 하였다. 만일 성탄 장식을 하게 되면 매해마다  식당에 카슈르트 (일명 코셔) 인정 마크를 해주는 것을 취소해서 더 이상 영업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식당의 카슈르트 인증 마크는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카슈르트 인정 마크를 받지 못하면 종교인들이 호텔이나 식당에 출입하지 않고, 식당 영업에 매우 큰 지장이 발생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도 조금씩 성탄 분위기를 어설프게나마 내려는 듯 하다. 작년부터 성탄절 기간에 케이블 TV 방송에서는 산타와 루돌프의 아이콘을 화면 하단에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하이파에서는 5480개의 재활용 플라스틱 병으로 성탄절 츄리를 장식하는 파격적인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주인공이 설 자리가 없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로 달하던 시대,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실 메시야의 탄생 예언을 입술로 읆조리면서도 그 가슴이 뛰지 않았던 서기관들, 그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의 갓난 아이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던 헤롯의 추악한 모습이 오늘날에도 그 방법과 모양은 다르겠지만 이 땅 이스라엘에 남아 있다. 아니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도 고질적인 질병처럼 숨어있다. 주인공을 환영하고 싶지 않은 바벨탑을 쌓아버린 이 시대의 비극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 땅에 다시 오신 예수를 곱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심문관 추기경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 시대의 주인공 혐오증과 무감각증을 고발한다. 대심문관은 자신이 아닌 예수가 민중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참아 견딜 수가 없었다. 예수는 먼 하늘나라에서의 경배 대상이 되어야지 땅에서의 경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12월이다. 한해를 정리하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돌아보라는 음성을 들을때이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그 분이 주인공이 되도록 이제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이다. 내 자리가 아니다. 그 분의 자리이다. 올해 성탄절은 그 분이 주인공 되심을 인정하였던 베들레헴의 목동들이 이땅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기를 , 그리고 나 자신이 그 목동들 중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Public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가성의 목마른 영혼을 위한 물  (4) 2014.01.03
겨자- 모든 씨보다 작은 씨  (0) 2013.02.28
다하브에서 예루살렘으로  (0) 2011.11.25
시내산에서 다하브로  (0) 2011.11.05
시내산 등정기 2  (0) 2011.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