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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Jews and Christians Seeing the prophets differen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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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구약 성서의 선지자들을 개인주의자들, 종교의 수호자들, 그리고 도전적인 사람들로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 그 자신들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순종하는 인물들로 이해한다. 하지만 유대 전통에 의하면,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 혹은 토라를 따라 살도록 강요하는 인물들이다. 두 시각의 차이점은 매우 두드러기 때문에 혹자는 유대인과들과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책을 읽고 있는지 조차를 의심할 정도이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의 예언서 내용들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서와 거의 다를바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서로 다른 시각 차이를 생산해 내었는가? 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그렇게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는가?

그 차이점은 단순히 간과할만한 것이 아니다. 내가 믿기로는 이 차이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기독교의 반셈족주의 (Anti-Semitism)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양편의 차이점은 성서의 목차만 보아도 즉시 알수가 있다. 유대 성서 -그것이 히브리어, 영어 혹은 독일어이든지-는 분명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는 토라 혹은 펜타튜크 (모세오경)이다. 두번째는 네비임 혹은 선지서로 유대 전통에서는 전기 선지서 (the Former Prophets)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있고 후기 선지서 (the Latter prophets)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권의 소선지서가 있다. 세번째는 케투빔 혹은 지혜서가 있다.

기독교의 성서는 전통과 언어에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후기 선지서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선지서가 구약 성서의 중간이 아닌 지혜서 다음에 위치해 있다. 우리는 언제 순서의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런 선지서들은 (때때로 선지서 문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4-5세기경의 기독교 성서에서도 구약성서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떻게 그 순서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서의 변화가 왜 있었는지를 합리적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구약의 선지서들은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성취된 예언들이 기록된 신약성서의 복음서 예언들과 나란히 비교 대상이 된다. 이는 기독교 이야기의 목적을 보기좋게 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으로 순서를 바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순서의 변화는 예언적 메시지를 유대적 상황에서 제대로 이해하는것을 빗나가게 만든다. 또한 이는 반셈족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버드 대학은 Henry Levinson은 최근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케투빔 (지혜서 - 히브리 성서의 맨 마지막에 위치함)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화해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독교의 구약성서에서 네비임을 성서의 마지막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서로 적대적인 상태로 끝을 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구약성서는 선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독설을 퍼붓도록 하고 영적인 절단을 창조해내고, 그 빈공간에 신약성서를 통한 좋은 소식과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은혜스런 하나님이 들어오도록 한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유대인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랍비들을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이 아닌 문자 그대로만을 따르는 불쌍한 사람들로 묘사한다. 선지서들을 성서의 마지막에 위치하도록 한 또 다른 이유로는 선자자들을 전통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개혁자들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적어도 16세기의 개신교의 개혁이래 개신교 신학자들과 성서 학자들은 히브리 선지자들을 그들의 개혁 수행을 위한 지지자들로 이용하였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히브리 선지자를 급진적이고 종교적 개인주의자로서 새로운 윤리를 세우기 위한 세력으로 이해하였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서 구약 성서의 선지자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겼다. 이러한 자아 정체성을 갖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개혁자들은 그들 자신이 속한 교회들과 심지어 다른 모든 단체들을 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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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여년이 지난 후에, 19세기경에 가장 유명한 성서 신학자인 율리시스 벨하우젼에 의해 동일한 위협이 감행되었다. 그는 카알 헨리힉 그라프가 제안한 모세오경이 4개의 서로 다른 저작층 (J 혹은 Jahwist - 신명 YHWH 혹은 Yahweh, E 혹은 Elohist - 신명 엘로힘, P - 제사장 문서 - 주로 레위기, D - 신명기와 신명기학파) 이 하나로 편집되었다는 설을 정밀하게 다듬었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후에 JEPD 혹은 문서설이라고 불리는 것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거의 모든 비판적인 성서 학자들은 이 문서설을 지지한다.

벨하우젠은 P (제사장 문서)를 제일 나중에 편집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인 측면이 부족한 율법과 의식의 제정을 소개하므로서 이스라엘 사람드르이 종교적 평판을 떨어뜨렸다. 벨하우젼은 복음서를 통해서도 유대교의 뒤떨어진 평판을 보여주었다. 그의 유명한 책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문제 (1878년 독일어 초판)에서 그는 JEPD 이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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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학창 시절 당시 나는 사울, 다윗, 아합 그리고 엘리야 이야기를 흥미를 가졌었다. 아모스와 이사야의 메시지는 나를 강하게 사로집기도 하였다. 나 자신 스스로 구약 성서의 예언서와 역사서를 읽었다. 하지만 나는 율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의 지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율법은 전체 문학의 기본이며 원리라는 말을 들어왔다. 적어도 나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와 이 책들에 관한 크노벨의 주석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이 자료로부터 역사서와 예언서에 관한 일종을 빛을 구하였을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율법에 의해 내가 구하였던 즐거움은 손상을 입고 말았다. 율법은 역사서와 예언서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율법은 마치 유령처럼 소리는 나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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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1867년 여름 괴팅겐에 방문하였을때 나는 카알 헨리힉 그라프로부터 율법을 선지서보다 후기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설의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나는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나는 토라(율법)없이 고대 히브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벨하우젠의 숙제는 반세기를 거치면서 개신교 구약 학자들에 의해 더 다듬어졌다. 문서설은 지적 종교적 자유를 지닌 원 이스라엘과 후세대 율법에 의해 자유가 구속을 받는 유대교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지을 수 있는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분명히 유대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반셈족주의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문서설은 반셈족주의의 근거뿐 아니라 반셈족주의 조직을 세우는 기초석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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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오늘날, 학자들은 선지자들을 현명한 개인주의자들로서 어리석은 정처, 사회 그리고 종교 기관들에 반대하는 인물들로 규정한다. 레이너 알베르츠의 최근 책인 "구약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 역사"에서 그는 선지자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한다고 설명한다. 알베르츠는 그의 책에서 한 장(chapter)을 "예언자적인 완전 대적" 이라는 주제에 할애하였다. 예를 들면, 9세기 경 선지자인 엘리야는 반군주제를 주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그는 나봇에게 음모를 꾸미는 부당한 왕 아합을 대적하였기 때문이다. 아합으로 인해 나봇은 죽게 되었고 결국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왕상 21:1-16). 공적인 대적을 통해 엘리야는, 알베르츠의 입장에서 볼때, 엄격한 감정을 지닌 선지자로 보였던 것이다.

예언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인 관점이 지닌 문제는 무엇인가?

선지자들은 그 어떤 제도화된 종교적 율법 혹은 전통과 관련이 없다. 사실, 이것은 그러한 제도화된 율법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 당시 틀림없이 종교적, 사회적 규범들과 관련된 일종의 규칙들 혹은 심지어 율법들이 존재했다. 학자들이 이 문제를 갖고 논쟁을 벌일때, 그들은 종종 토라에 대한 성서직 개념보다는 제도화된 율법이라는 틀에서 논한다. 하지만 제도화된 율법과 성서적 율법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토라의 개념 (여기서 말하는 토라는 히브리 성서의 첫 다섯권이 아니다)은 제도화된 율법 이상의 것이다. 토라는 하나님의 뜻,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 에 관한 현상, 선포 그리고 공식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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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율법의 범주안에 완전히 빠져있다고 할 수있다. 그들은 개인주의자들로 비쳐질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로 율법의 의무를 행하였다. 하나님은 토라에서 그가 명한 것을 그의 백성들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선지자들은 바로 이 율법 혹은 토라를 전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다른 새로운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았던 율법을 백성들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전하였다. 토라의 개념은 히브리 성서의 첫 부분인 모세오경뿐 아니라 다른 두부분 (예언서, 지혜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이다.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사 2:3)라고 이사야는 선포한다. 또한 그의 예언 첫부분에서도 이사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 1:10) 라고 말한다. 선지 문학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말 4:4)라고 백성들에게 경고한다. 시편 역시 "주의 율법" (시 1:2)을 부지런히 묵상할 것을 권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히브리 성서에서 율법은 이스라엘 종교 역사와 성서 전체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토라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 선지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독일 성서 학자인 게르하드 폰 라드는 말하기를 선지자들이 율법을 선포하였고 사실 그들이 첫번째로 전한 것은 율법이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폰 라드는 벨하우젠이 율법과 선지서 사이의 갈라진 틈을 연결시겼다. 이는 현대 성서 학자들에게 히브리 성서를 원 유대 컨택스트 상황에서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수순을 밟은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폰 라드는 이 논쟁을 해롭고도 공격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는 선지서들이 율법을 파괴적으로 선포함으로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종말을 이끌어냈다고 논쟁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폰 라드는 선지자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전 인류를 위한 해로운 미래를 열 것이다. 이 접근 방식은 분명히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를 "예언" 과 "성취"라는 양식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 관점에 있어서 폰 라드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벨하우젠의 유산을 갖고 있는 현대 개신교 성서 학자들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고 히브리 성서를 원 유대 컨택스트내에서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논증과 해설이 있다. 하지만, 늘상 예언서 문학과 함께 혹은 그것을 별개로 하는 방법이었다. 이스라엘 종교는 복잡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교가 없는 선지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없다. 불행히도, 특정 예언적 종교 현상이 현대 개신교 신학에 하나의 전형적인 요소로 남아 있다. 흔히 이러한 상상의 예언적 종교는 독립적이거나 혹은 이스라엘 사회 종교에 적대적인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선지서를 성서적 이스라엘에 없어서는 안될 부분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지서가 이스라엘의 남은 부분으로부터 다른 것인가를 질문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어떻게 선지서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종교와 사회 정치 생활에 기여하였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스라엘 종교의 전체적인 전통없이 선지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스라엘 종교를 선지서 없이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특별히 선지서와 율법의 관계, 그리고 율법과 선지서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관점을 택한다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의 본문을 동일한 관점으로 보는가 그렇지 아니한가는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본 글은 Biblical Review 2003년 2월 Rolf Rendtoff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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