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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성서 네러티브 읽기 3 - 성서의 단역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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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히브리대 스포츠센터에서 찍은 것입니다. 아래 내용과는 상관 없지만, 이번 학기 사작하면서 시작된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대학 교수님들의 스트라이크가 벌써 5주를 넘기고 있습니다. 꼭꼭 걸어잠긴 자물쇠처럼 언제 스트라이크가 끝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아래 글은 "Reading prophetic narrative" by Uriel Simon 중 263-269 페이지를 번역한 것입니다. 글이 약간 길기 때문에 1-2부로 나누어서 올릴 예정입니다. 내용은 성서 네러티브에 등장하는 단역 배우들의 이야기속 역할 및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성서 네러티브에 등장하는 인물들중에는 매우 짧은 단역들이 있다. 심지어 요셉 혹은 에스더와 같이 매우 긴 이야기에 겨우 1-3번정도밖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매우 드물게 단역들의 대화가 3자 구도의 대화로 발전한다 ( 여기서 3자 구도의 대화로 발전한다는 의미는 단역들이 주연들의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거나 사건에 동참하는 것을 뜻함- 역주). 네러티브의 초첨은 항상 주인공에게 맞춰져 있으며 단역들의 운명이나 인물의 성격들은 거의 무시된다. 예를 들어, 요셉 이야기는 매우 길지만 루우벤은 단역 역할만을 맡고 있으며 납달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사실상 야곱의 아들들은 집합적인 인물들로서 행동, 여행, 반응등이 매우 평이하게 묘사될 뿐이다. 다윗의 아들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그들의 이름과 두번의 운명적인 만찬에 참석했었다는 것 뿐이다 (삼하 13:27-36, 왕상 1:9, 25). 다만 간접적으로 이들이 아버지 다윗과 함게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갔다는 것 (삼하 15:16)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서는 이들이 압살롬에 대항해서 전쟁에 참여했는지, 압살롬이 죽었을때 다윗의 슬픔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혹은 다윗과 요압 사이의 갈등속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 침묵을 지킬 뿐이다.

궁켈은 이러한 단역들의 이야기속 역할에 대해 사회 발전의 초기 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집단으로부터 개인들이 섬세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궁켈은 고대의 나레이터는 개인 혹은 많은 등장 인물들의 특징들을 평가하고 기술하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켈은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그리고 문학적 제한이 오히려 성서 네러티브에서 주인공에게 초점을 분명하게 맞추도록 하는 보상을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설명은 모든 시대와 문화속의 이야기 전달자들은 동일한 목적을 갈망하고 있다는 추정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한 작품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초기 단계의 이야기로부터 고등 수준으로 발달하는 이야기의 진화 과정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각 작품의 초기 형태 혹은 고도로 발달된 드라마 형식이 되어 버린 오페라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르네상스 조각품에 어울리는 기준을 갖고 중세 조각을 판단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모든 예술 양식은 각자 나름대로의 특별한 기준이 있고 가능성들과 제한성이라는 조건에 통제를 받는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독특한 표현 양식이 있으며, 이 표현 양식이야말로 목적들과 방법들을 고유하게 유지하는 것들이다. 표현 양식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각각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성서 네러티브의 공식적인 독특성과 이 독특한 양식이 내포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극도로 제한된 배역을 설명하는 대신에 우리는 먼저 문학적 사실, 문학적 범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며 나레이터에 의한 기교적 사용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하게 되고, 불필요한 해석을 하는 경향으로 치우치게 된다. 매우 예민한 주석가였던 헤르쯔버그는 미갈이 다윗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건중 단지 두구절에 지나칠정도로 집중을 하였다.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며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삼하 3:15-16). 헤르쯔버그는 발디엘과 헤어져서 다윗에게로 돌아가는 미갈의 반응에 대한 나레이터의 침묵을 정치 놀이에 저당잡힌 여인으로 해석을 한다. 발디엘이 울면서 미갈을 뒤따라올때 아브넬의 결정에 대해서는 이야기에 기술되어 있다. 반면, 나레이터는 미갈을 예루살렘 근처 바후림에 버려둔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미갈이 다윗을 만났던 헤브론으로 갔다는 추정을 하도록 한다. 이로 보건데, 나레이터는 이스보셋과 아브넬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에 대해 초점을 둔 것이지, 사울의 딸이며 발디엘의 아내, 어릴적 남편이자 현재는 왕이 된 남편에 대한 미갈의 감정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카프만이 사용했던 "성서 네러티브의 생략적 특징" 혹은 알터의 "과감한 선택" 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예가 된다. 모든 시대, 장소의 나레이터들은 그들의 수사적 의도와 독자들과의 문학적 대화를 유지하면서 선택, 거부, 늘이기, 축약을 한다. 성서 나레이터의 의도는 사건의 한 단계를 지나쳐버리고 칠십인역 번역가들과 요세푸스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그 빈공간을 채우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네러티브 본문에 대한 이들 (칠십인역 번역가들과 요세푸스)의 부연 설명은 헬라의 독자들이 주어진 택스트를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걱정때문이며 사건을 이해하기 쉽고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기대 때문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이러한 기대감들을 공유하기 때문에, 카프만과 알터는 독자들이 칠십인역의 번역가들이나 요세푸스의 택스트에 대한 가정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카프만은 사건속에 나타나는 빈틈들이 매우 일반적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 알테는 이 빈틈이라는 방법이 주는 심미적 의미를 드러내려는 시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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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점심 시간이 되면 구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홀로(?) 식사를 합니다. 잔듸밭에서 먹으면 좋은데 그놈의 고양이들이 달려 들어서 위협을 가히기 땜시 방해 받지 않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빈의자와 빈강의실.... 스트라이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러티브에서 이 생략적 특징은 단역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모세의 누이가 갈대 상자를 지켜보고 있다가 바로의 딸에게 유모를 제안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누이와 아론의 출생에 관한 기사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출 2:1-8). 이와 비슷하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하는 동안 그의 종을 보내지만, 어디로, 언제 보냈는지, 어떻게 그가 엘리야의 종이 되었는지, 선지자가 이스르엘 평야를 초인간적인 힘으로 달리는 동안 이 젊은 종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왕상 18:42-46), 혹은 언제, 어디에서 그가 주인과 다시 합류를 하였는지 (왕상 19:3)에 대해 전혀 네러티브는 말이 없다. 이처럼 단역에게 초첨을 맞추거나 무시하는 자유는 창 22장의 이삭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아브라함에 브엘세바로 두명의 종들과 함께 돌아올때 이삭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에 아브랗마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창 22:19)." 미드라쉬에 의하면, 이삭은 아브라함과 함께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문학적 주석은 이삭이 그의 아버지와 동행했다는 것을 내용상 자체적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이를 기술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현대의 독자들은 문학가들과 주석가들의 양식적 예민성이 끌어내는 주석적 결론을 함께 공유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 종들과 함께 돌아올때 이삭에 대해 왜 무시를 하였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요한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한 조연급 역할애 대한 공식적인 표현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러티브의 생략적 양식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제거해 버리지는 않는다. 욥의 아내는 욥기 마지막 두장에 언급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주께서 그녀를 욥의 아내로 다시 회복시켰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좀더 과감한 누락은 기본적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측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게 한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려 했던 그 뒷배경은 무엇이었는가? 왜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했는가? 우리아에 대한 밧세바의 감정은 어떠했는가?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 소제부터 저녁때 몰사할때까지 아합은 갈멜산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일반적으로 보조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행동이란 감정은 사건의 진행에 그들이 요구될때, 다른 인물에게 조명을 비춰야 할때에만 그들에 대한 묘사가 기술되는 것이지, 단역들 자신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기술되지는 않는다. 주인공들은 각각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공의 개인적 특징은 이야기 주제의 기본 골격이다. 따라서 나레이터는 주인공들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이는 사건 이해를 위한 필수적인 부분뿐 아니라 사건의 결정적인 본질에 대한 완벽한 정보 전달을 하기 위해서이다. 네러티브가 조상들에 대한 행위를 자세하게 기술할때 그 조상들의 행위는 후손들에게 삶의 안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주인공들의 정체성을 위한 기준은 그들이 많은 행위들이 네러티브속에서 재반복되기 보다는 주인공들 자신에 대한 깊이있는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단 한명의 주요 인물만을 자세하게 부각시킨다. 물론 몇몇 네러티브들은 두명 혹은 심지어 세명의 인물들을 자세히 묘사하기도 한다: 유다와 다말, 사무엘과 엘리,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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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난 17일날 전국적인 대규모 스트라이크가 있었습니다. 교육 개혁을 외치며 약 5-7만명 정도가 모였다고 하네요...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전단지 입니다.

몇몇 단역들의 주요한 기능은 사건을 앞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기능은 네러티브에 심오한 의미와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사무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에는 세명의 조연들이 나온다. 브닌나 - 잔인한 업신 여김으로 사건 진행에 자극을 준다. 엘가나 - 위로의 말로 사건 진행을 더디게 한다. 엘리 - 꾸짓음으로 사건 진행을 더디게 하고, 후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한나를 축북함으로 사건이 절정에 이르도록 이끈다. 또한 엘가나는 이야기속의 영우인 아내와 대조적인 역할을 함으로 한나의 역할을 매우 잘 부각시킨다. 사건 진행을 위한 단역들의 역할을 고려하여 주석가들은 이들이 보조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라는 결정뿐 아니라 사건 진행상 이들의 역할을 설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조 인물들이 이야기속에서 중요 역할로 추가될때 주석가들은 반드시 이들의 기능을 주어진 네러티브 상황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단역들에 의한 표현된 보조 역할을 정의하고 구분을 해보고자 한다.

성서 네러티브는 감동과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교육적이고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다. 에릭 아우르바크가 주장한 것처럼, 성서 네러티브는 감정과 감상보다는 의지와 지성에 더 호소를 하는 것으로 시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네러티브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 대한 기술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성서 나레이터의 동기는 네러티브 양식을 통해 관계들, 연관성들, 삶의 특정 개님들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 나레이터는 전체 상황속에 드러나는 "획일적인 설명"을 기술하기 보다는 이야기의 주요 장면들에 주목하는 것을 선호한다. 엘가나의 또 다른 부인인 브닌나는 사무엘의 출생 이후 해마다 있는 절기 순례에 동창하였는지에 대해 언급이 되지 않는데 이는 나레이터가 한나에게 일어난 기적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브닌나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영웅에 대한 단역의 상대적인 입장은 특정한 교차도로에서 궁지에 빠진 영웅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과 영웅의 결정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모세를 향한 여호수아의 조언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민 11:28]), 아합의 명을 받고 미가야에게로 나아간 사자의 확신에 찬 조언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왕상 22:13])은 이 두 선지자들 (모세와 미가야)에게 분명치 못하던 판단을 오히려 명확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사건에 대한 확실한 진술을 하도록 자극을 하기도 한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추는 것을 경멸하였던 미갈과 밧세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주(다윗)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신하들은 다윗의 이례적인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삼하 6:20-23 & 12: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