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바위 돔 (흔히 황금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 오마르 사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오마르 사원은 예루살렘 성묘 교회 근처에 있는 사원입니다. 바위 돔은 사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은 돌 위에 강력한 기도자처럼 서있다. 우마야드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 (685 - 705 C.E)가 세운 이슬람 제단인 바위 돔은 예루살렘의 이전 주인이었던 기독교를 대체하는 이슬람의 상징이 되었다. 바위 돔 뒷편으로 푸른색이 도는 회색 돔 건물인 성묘교회가 보인다. 아랍 정권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 성묘 교회는 도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물일 뿐 아니라 가장 거룩한 장소였다.
638년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파함족 출신인 카할리드 이븐 트하비트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시리아의 중요한 도시들이 무슬림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뒤에 콘스탄티노플의 원조가 끊어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주교 소프로니우스는 소망을 잃게 되었다.
아랍군은 북쪽 혹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비잔틴 제국의 도시들을 정복해 갔다. 가이사랴에 있는 기독교인들만이 홀로 남아서 대항하였지만 얼마 가지못해 무슬림들에 의해 정복 당하고 말았다.
아랍 정권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동안에도, 유대 광야 산지에 자리한 예루살렘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좀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 7세기 초, 예루살렘은 로마 시대 당시 세워진 성벽과 망대 그리고 성문으로 인해 거의 난공 불락의 성채였다. 당시 아랍 세력은 요세화된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무기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의 기독교 주교는 항복을 결정하였다. 대부분 아랍 역사 자료들은 예루살렘 정복과 관련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다만 9세기경에 기록된 이슬람 정복 기사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주교 소프로니우스가 항복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어쩌면, 역사는 이 특이한 사건을 역사 기록의 작은 그림자로 남겨 두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사진: 성묘 교회 - 성묘교회의 돔과 바위 돔의 돔 사이즈는 동일합니다.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손에 넘어간 후, 이슬람의 사상과 종교적 실천으로 가득찬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기독교 색체로 가득했던 도시는 이슬람의 거룩한 도시가 되었고, 예루살렘 정복 약 1세기 후 정복과 관련된 이슬람 전통들이 기록되면서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화는 탄력을 받게 되었고, 이슬람 문서 집필시 예루살렘은 단골로 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사실 이슬람 정복자들은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재빠르게 인식하였으며 많은 무슬림들은 이 특별한 도시를 이슬람이라는 왕관에 하나의 보석처럼 장식하기를 원하였다.
예루살렘 정복과 관련하여 많은 전통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권위적인 전통으로 인정받는 것은 칼리프 우마르 (634-644 C.E)의 정복 기사이다. 이 전통에 의하면, 우마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할때 그는 성전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그의 이름을 딴 모스크를 세웠다. 이는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메시아 사상으로 가득차 있는 도시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루살렘이야 말로 그들이 갖고 있는 메시아 열망이 성취될 도시로 믿고 있다.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다윗 가문 출신으로, 유대땅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그의 보좌를 만들것이며 유대 왕국을 새롭게 하고 해방을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 기독교인들에게, 메시아는 역시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죽고 장사되었지만, 부활 승천후 세상 끝날과 새천년 시대에 그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예루살렘 정복과 관련된 이슬람의 전통들 역시 메시아 사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칼리프 우마르는 선지자 무하마드 다음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슬람 저작들은 우마르에게 "알 파루크"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 단어의 뜻은 "그는 옳음과 그름을 구분한다" 로 신적 선택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어원에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메시아"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 전통에서는 우마르가 메시야적인 행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처럼 우마르 역시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 산과 겟세마네를 지나 동문을 통해 성전산에 들어와 솔로몬의 성전터를 발견하고 모스크를 건축함으로써 옛적 성지에서 드려졌던 예배를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7세기 초, 메시아에 대한 열망과 종말론적 사상들은 이슬람의 핵심이었다. 선지자 무하마드는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강조하였다. 전통에 의하면, 무하마드는 손가락 두개를 펴서 서로 맞대어 놓고 "나와 심판의 시간 사이에는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코란은 심판주인 알라를 찬양하고 종말에 있을 사건들을 자세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손에 넘어간 후,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마지막 심판날에 메시아 사건이 있을 도시로 이 도시를 주목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종말론적 사상을 꽃피울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근 삼백년 동안 기독교 문화속에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고난,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뿐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 사도들과 초기 순교자 이야기들을 예루살렘 곳곳에 새겨놓았다. 7세기 당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금방이라도 있을 듯한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 성묘 교회와 승천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의 상징들로서, 예수께서 곧 다시 오셔서 그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신앙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사진: 승천교회
성묘 교회와 승천 교회 사이에는 성전산 - 유대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케다 사건이 있었던 모리아 산- 이 있다. 성전산은 헤롯과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슬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때, 그들이 본것은 버려진 거대한 광장을 보게 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하신 예언을 무언으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2). 기독교인들에게 버려진 성전산은 유대교로부터의 승리를 증거하는 한 산물이기도 하였다.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의 독실함을 흥분속에서 발견하였다. 도시는 교회, 바실리카, 수도원, 순례자의 숙소, 순교자 기념 교회들로 가득하였다. 16년 동안 페르시아의 짧은 지배가 끝난 후 630년 기독교인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십자가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황제의 입성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는 기념적인 사건이었으며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기대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때가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아닌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주인이 된 무슬림 정복자들은 도시가 얼마나 성스러운지를 쉽게 이해하였으며, 코란이 말하는 종말론적 환상이 바로 이 거룩한 도시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예루살렘이 기독교 도시로 300년을 보냈지만 여전히 도시는 유대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 의해 유대인들이 도시로부터 쫓겨난 후 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도시는 유대교의 색체가 남아 있었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 성경이라는 경전을 바탕으로 사역을 했고, 그들의 삶의 모습들이 새겨진 도시를 훗날 기독교인들이 그대로 간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유대인의 성전이 있던 자리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 자리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성전이 있던 자리의 파괴는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진리 그리고 성공을 보여주는 장소이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유대인의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을 장소였다. 자연스럽게 성전산은 아담,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솔로몬 (무슬림들은 제 2차 성전 시대 혹은 헤롯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과 연결되었으며, 무슬림 정복자 역시 예루살렘의 찬란했던 영광을 재현함으로 무슬림의 거룩한 성지로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1996년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인 올레그 가르바르는 "거룩함의 실현 (The Shape of the Holy: Early Islamic Jerusalem)" 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어떻게 이슬람이 기독교인의 예루살렘을 메카와 메디나와 같은 거룩한 도시로 거듭나도록 만들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기술하였다. 가르바르는 예루살렘의 이슬람화는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십자군 시대의 서막이 열린 주후 638년과 1099년에 사이에 이뤄졌다고 제안한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여러 왕조들의 지배를 받았다: 1) 메디나의 칼리프 - 632-661년, 2) 우마야드 칼리프 - 661-750년, 3) 바그다드의 아바시드 - 750 - 878년, 4) 이집트로부터 온 지배자들 - 투룬이즈, 이크시즈, 파타미드, - 878 - 1099년
사진: 6세기경에 만들어진 마다바 지도중 예루살렘
가르바르는 이 모든 지배자들 중에서 우마야드 왕조를 가장 중요한 왕조로 본다. 이 왕조는 아브드 알 말리크 (685-705년)때 예루살렘에 무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바위 돔을 건축하였다. 이 건축은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성지로 만드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르바르는 근 40년 이상 바위 돔 연구에 몰입하였다. ( 1959년 그가 쓴 예루살렘에 있는 우마야드 바위 돔은 이 분야에 있어 최고의 논문들중 하나이다.) 다른 비-모슬림 학자들과는 달리 가르바르는 무슬림 와키프 당국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전산 (무슬림들은 하람 알 샤리프 혹은 존귀한 성소라고 부른다)의 많은 장소들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오늘날까지도 비-무슬림들은 성전산 연구를 공식적으로 허락받을 수 없다. 또한 가르바르는 여러 명의 훌륭한 조력자들 - 사진 기사 (사디 누세이베), 컴퓨터 전문가들 (무하마드 알 아사드, 아베르 아우데)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유롭게 바위 돔과 알악사 사원과 그 지하까지도 출입할 수 있었다. 이들의 노력은 가르바르가 쓴 "거룩함의 실현" 그리고 사디 누세이베와 함께 출간한 "바위 돔" (1996)을 통해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슬람의 예루살렘 재구성의 대표적 건물이라 할 수 있는 바위 돔은 이슬람의 정복후 거의 2세기 후에나 건축되었다. 이 건축물은 초기 이슬람 건축물들중 기념비적인 건축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사진: 바위 돔의 내부 구조- 이중 옥타곤 형식입니다.
하지만 바위 돔은 건축물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위 돔 남쪽과 동쪽 문에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 하나님 (알라)의 유일성과 무하마드의 예언은 진리이다", "예수의 성자 (son of God)됨과 삼위일체는 거짓이다."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 당시의 건축물과 주화들, 마일 표석 (milestone), 그리고 다른 건축물들에는 이 글귀가 짧은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건축물들에는 이슬람 신앙의 간단 명료한 글귀들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에게는 동등한 다른 동반자가 없다." 라는 글귀를 금과 은 주화에 새겨 넣기도 하였다 (696년 경).
바위 돔은 반 기독교 정책을 펴기 위한 하나의 장치 이상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중으로된 옥타곤 (8각형) 형식과 지붕을 돔으로 만들게 된것은 특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건축 형식은 일종의 기념을 위한 건축형식이다. 가르바르는, 바위 돔 건축이 성묘 교회나 네아 교회 (저스틴 황제가 건축한 동정녀의 새 교회 - New Church of the Virgin)에는 없는 권능과 웅대함으로 충만한 이슬람의 존재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가르바르는, 바위 돔이 일반 이슬람 사원이 아닌 하나의 성소이며 돔안에 있는 바위를 존귀히 여기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그 바위를 중요하게 만들었는가? 비록 대부분의 전통들은 돔이 건축된 뒤에 바위를 장식했다고 하지만, 그 전통들은 옛적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기억은 바로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성전이다. 무슬림들은 바위 돔에 있는 바위에는 솔로몬 성전의 흔적이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전통은 그 나름대로 믿을만한 이유를 제시한다. 아랍 정권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얼마 안되어, 무슬림과 유대인은, 그 전 유대인들이 제의 장소로 발전시킨 그 장소 (바위 돔 - 성전이 있던 터)에 있는 바위 주변에서 경배를 드렸다. 4세기 초 유대인들은 아빕월 9일째 되는 날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날 제 1차 성전과 제 2차 성전이 무너졌다고 믿는다) 성전산에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135년경부터 유대인들의 성전산 방문은 전면 금지되었었다.) 성전산 방문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게 된 슬픔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였다. 333년경 보르데우스 필그림 이라 불리는 글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하드리안의 동상 (135년경 하드리안은 유대 제 2차 봉기를 진압한 후 그 자신의 동상과 쥬피터의 신전을 성전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바위가 있다. 그들은 그 바위에 파인 구멍에 기름을 붓고, 그들의 옷을 찢으며 큰 소리를 울부짖었다."
사진: 바위 돔 천장
몇몇 기독교 자료들에 의하면, 비잔틴 시대 당시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산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바위에 기름을 부었다. 유대인들이 기름을 붓는 행위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 출 40:9-16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의 봉헌을 위해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삼상 16:13에서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다). 히브리어,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며 헬라어, 크리스토스 혹은 그리스도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 따라서 매해 아빕월 9일에 제사장 계열의 가족들이 일반 유대인들과 함께 성전산에 와서 바위에 기름을 붓고 시편 혹은 예레미야 애가를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제의적 행위는 무슬림들에게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터가 얼마나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사진: 바위 돔 내부 - 상부에 있는 돔에는 반 기독교적인 글귀가 적혀 있다. 글의 내용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선지자임을 강조한다: "사람의 아들 메시야 예수는 진정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이다. 또한 글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선지자들을 믿으라 / 삼위일체에 관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라/ 당신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관심거리에 종지부를 찍으라 /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분이시다 /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셨다든가 혹은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몇년 전에 나는, 초기 무슬림들에 의해 건축된 바위 돔은 성전 재건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제안하였다. 따라서 신성한 건물의 건축은 기존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 즉 성전산 터는 황폐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개념에 대한 반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초기 유대 미드라쉬에 의하면, 비록 바위 돔이 건축된 후 약 60년뒤에 기록되었지만, 무슬림들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선도자로 찬양하고, 무슬림 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였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믿을만한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바위 돔을 솔로몬의 성전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이 전통은 11세기 초 (첫번째 십자군 운동이 있기 약 50년 전)에 편집된 "예루살렘의 찬양들" 로 알려진 문학 작품에 나타난다.
이 전통을 편집한 무슬림 학자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알 바쉬티로 바위 돔 건축과 그 건축의 이유들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바위 돔이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 건축된 후, 그는 이 건축을 봉헌하는 제의적 의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제의적 의식은 이슬람의 종교적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알 바쉬티는 그 제의적 의식을 그 어떤 거부 반응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다. 사실 그는 그 제의적 의식이 새로 건축된 건물에 매우 적절한 행위였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제의적 의식들은 바위에 특별하게 만들어진 연고와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알 바쉬티는 이 연고의 제조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다)
알 바쉬티는 유대인의 성전에서의 제의를 연상케 하는 바위 돔 제의 의식을 기록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바위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바로 그 바위 위로 돔을 씌웠다. 그는 다른 전통을 인용한다.
"타위라트 (성서)에 기록되기를, "예루살렘을 기뻐하라", 그리고 그 바위는 하이칼 (히브리어로 헤이칼 - 의미는 성전의 성소 - 시편 27:4, 65:5 (히브리어 성서) 65:4 (한글 성서)."
사진: 루잠 사파르에 있는 비잔틴 시대 요새에서 발견된 무슬림의 신앙 고백 (7-8 세기 경): 바위 돔에 있는 글귀처럼 이 글 역시 유일신을 강조하고 삼위일체와 예수의 신성을 믿는 것을 비난한다.
바위 돔에서의 주요 행사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있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이 날들은 제의 의식을 행하는 특별한 날들이었다. 예를 들면,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에는 성서를 공공 장소에서 읽는 날이다. 또한 이 날들은 금식을 하는 날이며, 아침과 오후 기도 시간에 특별한 간청을 드리는 기도 시간이 있다. 주목할 것은, 이처럼 유대인의 전통 의식이 이슬람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이다.
이 모든것으로 보건데, 바위 돔의 건축은 정치적, 종교적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바위 돔 건축 직후, 다섯 유대인 가정이 바위 돔내의 등잔 심지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는데 고용되었다. 유대인이 바위 돔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바위 돔의 등잔을 준비하는 일은 유대인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행하는 일과 매우 흡사하다.
사진: 7세기 후반에 주조된 이슬람 동전에 새겨진 글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와 동등한 동역자는 없다.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 당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 주조된 금화와 은화, 마일 스톤 그리고 건물들에는 이와 비슷한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당시 랍비 문헌에서는 유대인들이 성전의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 없다. 이 금지 사항은 십자군 시대를 지나 마믈릭 시대까지도 나타나지 않다가 1488년 예루살렘의 랍비 오바댜 다 바르티노르가 그의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난다.
비잔틴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시리아 지역을 무슬림이 정복한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과의 조우는, 무슬림으로 하여금 예루살렘과 성전산을 거룩한 장소로 간주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란은 예루살렘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영적인 장소로 알게 된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이 있은 후였다. 그들은 도시와 관련된 성서의 사건들을 배우게 되었고 특별히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많은 전통들을 듣게 되었다. 솔로몬은 코란에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코란에 나오는 성서 인물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인해 유대교와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사진: 무슬림들은 이 바위를 "아스 사크라 (the rock)"라고 부른다.
무슬림 사이에도 이미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존재했지만 유대인들은 더 깊이 있는 기대감을 불어 넣았다.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정복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올 것으로 여겼으며, 이제 곧 성전산에서의 예배가 재개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 바위 돔이 건축되고, 봉헌식때 바위에 기름을 붓고, 매주 월요이과 목요일에 향을 피우고, 불을 밝혔다. 사실, 무슬림들에게 이러한 제의적 행위는 자신들을 솔로몬과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대적자인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성전산은 황폐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앙적 개념을 뒤집을 수 있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우마야드 왕조때 세운 바위 돔은 성전을 복원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무슬림의 정복은 이스라엘 회복의 첫 출발로 여겼다.
이 글은 아래 성서 고고학 잡지를 번역한 것이며, 첫번째 사진은 직접 찍은 것이며 그 외 사진들은 잡지에 실린 사진들을 업로드 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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