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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iary

삶의 안주에서 신 벗음의 삶을 향해



잠을 설치다 일어나, 잠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갖었다. "삶의 자리" 를 찾기 위한 기도. 내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과연 지금 이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인가? 잘못된 번지수에 앉아서 안주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안주"라는 단어는 그리 어울리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에 익숙한 인물이 되었다. 몇년 혹은 몆십년 전 그에게 불타던 젊은 혈기와 민족을 향한 열정은 온다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는 광야의 양치기라는 다소 목가적인 삶에 적응된, 안주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그에게 요구된 것은 "신을 벗는" 것이었다. 

요셉 역시, 종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한 집안의 사무장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그가 성실한 노예로, 그리고 인정받는 노예로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주하는 삶에 파도가 쳤을때, 비로소 그는 안주된 삶이 아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양치기 다윗도 그런 인물이었다. 어찌보면, 이세가 그 막내 아들 다윗을 전쟁터로 보내는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랑하는 자녀를 전쟁터로 보내 형들의 안부를 묻는 다는 것은 도저히 아버지로서 할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 삶의 자리는 양치기가 아닌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주하는 삶을 그리 기뻐하지 않으신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비 인간적인 삶과, 자녀들이 나일강에 던져지는 비극을 잊은채 그들의 배를 즐겁게 해주었던, 음식과 과일들을 떠올렸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안주를 그리워 하였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세례 요한은 철저히 그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안주를 뒤로 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인기는 그를 쉽게 유혹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와 같았다. 그는 삶의 안주를 절대 꿈꾸지 않았으며 바라지도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의 안정를 추구한다. 어쩌면 이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원하는 욕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삶의 안주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였다. 안정된 삶을 위해서는 세상의 권력, 명예 그리고 물질이라는 삼대 요소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도시 한복판에서 삶의 안주를 버리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그는 빈들의 사람이었으며 광야의 소리였다. 그가 외친 메시지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였다. 현대 교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들은 지옥, 재림에 관한 설교, 그리고 회개와 관련된 설교란다. 아마 현대 교회에서 세례 요한이 목회를 했다면 그는 얼마가지 못해 짐을 싸야만 하는 씁쓸한 목회를 경험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큰,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 삶의 안주에서 벗어나 광야로 몰려들었다. 세리도, 창기도, 군인들도, 심지어 종교인들 조차도 세례 요한을 찾았다. 갈릴리의 어부들도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의 가슴을 도려내는, 삶의 안주를 흔드는 외침에 자신을 굴복시켰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 역시 삶의 안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따름의 삶을 요구하셨다. 그가 가는 곳을 밟아가는 In His Step 의 삶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DNA는 삶이 주는 안정감으로 인해 삶의 만족을 얻는 그런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가야한다면, 그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는, 신 벗음의 삶을 살아간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 주님의 것이라고.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 분의 부르심에 겸손히 따르기를 준비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신 벗음과, 삶의 안주를 꿈꾸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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