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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iary

광야의 들꽃처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지난 2-3주 전에 세례 요한 빈들 수도원에 다녀왔습니다.  수도원은 광야속의 빈자로서의 삶을 산 세례 요한의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향기의 정취를 마음에 새기고 가라는 듯 외지고 거친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세속 세계의 때가 뭍은 저에게 그 날은 그 먼지들을 씻고 광야의 영성을 묵상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거친 광야의 이름 모를 들꽃처럼, 광야의 빈자로서의 삶을 산 세례 요한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눅 1:66)" 라는 큰 기대감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빈 들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세속 세계에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풍요로움과 안락이라는 의자를 내려왔다. 그리고 거친 광야에 그의 부드러운 발을 맡겼다. 거친 모래 바람과 쉼없이 내리쬐는 모진 햇살은 그를 이름 없는 겸손의 빈자의 삶의 향기로 그의 내면 세계를 채우게 하였다. 

기나긴 기다림과 기대감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들을 향해, 그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가 찾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는 인생들의 헛된 주목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들의 박수와 환호성 뒤에 숨겨져 있는 교만이라는 달콤하고도 진한 유혹의 뿌리를 뽑아 버릴 줄 알았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도덕적 불감증을 지적하였을 때, 불의에 대한 침묵은 결코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외쳤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을때 세상은 그의 죽음을 한낱 보잘것 없는 빈자의 죽음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였다. 그는 신랑을 보고 참으로 기뻐하였던 자였다. 그는 기꺼히 자신이 취할 수 있었던 영광을 내려 놓을 줄 알았다. 그는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서의 삶으로 인해 충분히 행복을 누렸던 인물이다. 

세례 요한이라는 거울을 바라보면서도, 왜 우리는 그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흉물스런 모습들을 벗어버리지 못하는가?  써서는 안될 영적 가면을 뒤집어 쓴채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럽고 불쌍한가? 광야의 빈자 세례 요한 그는 거울이다.


빈들 수도원 교회 전경입니다. 


광야의 빈자 - 세례 요한


빈자 세례 요한이 기거하였다는 동굴 



광야의 빈자 - 그 들꽃같은 삶의 길에 내 자신이 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