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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Story

성을 만드는 자와 길을 내는 자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그러나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한다" 툰엔쿠크

 

툰엔쿠크의 비문에 적인 이 글귀는 흔히 도전과 개방을 표현할때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인류 역사와 성서의 역사를 살펴 보면, 성을 쌓는 자는 결국 망하였다. 그 어떤 철옹성도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리고 성은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었고, 헤롯이 만든 맛사다는 사방이 깊은 계곡으로 되어 있어 적들이 접근할 수 없는 천연 요세였다. 예루살렘 성 역시 북쪽을 제외하고는 기드론과 힌놈 골짜기로 둘러쌓여 있는 요세였다. 그러나, 결국 이 성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유적 발굴 현장에는 "텔 (tel/tell)" 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이 텔은 성의 건축과 파괴의 반복으로 인해 생긴 언덕이다. 그 언덕을 파내려가 보면, 옛 시대의 영웅들이 남긴 돌들의 흔적들, 무너진 성들의 층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남긴 업적은 성들을 쌓은 것들이다. 그의 정치 생활 40년 중, 그는 성전 공사 7년, 자신이 거할 궁전 건축에 14년을 보냈고, 게셀, 므깃도, 그리고 하솔에 성을 건축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였고 성전산과 다윗성 사이에 "밀로"를, 벧호론에 성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왕상 9:15-22). 성을 건축하기 위해 많은 역군들을 동원하였는데, 결국 그가 죽고 나서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유들중 하나는 솔로몬이 성들을 건축하기 위해 동원하였던 노역 때문이었다. 그가 건축하였던 성들은 훗날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에는 무너져 버렸고, 그 무너진 터 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무너질 성을 쌓았다.

 

무너질 성들을 쌓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길을 만든다. 그 무엇이든지 시작은 반드시 있다. 그 옛날 누군가는 길을 만들었다. 누가 그 길을 만들었는지는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가 만들었던 그 길을 따라서 누군가 걸었을 것이며, 그 발걸음이 남긴 흔적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길은 단단해졌고 넓어졌으며, 오솔길이, 마차가 다니는 길로, 그리고 문명의 발달과 함께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되었다.

 

 

사진: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베두인 여인들

 

성서의 세계속에서도 길들이 등장한다. 해변의 길 (비아 마리스), 왕의 대로 그리고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었던 이스라엘 중앙 산악 지역을 따라 난 족장의 길은 성서 인물들의 역사적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길들이다. 그 길들은 파괴가 아닌 발전 단계를 거쳐 여전히 남아 있으며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광야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혹은 지나간 흔적이 있는 길을 걸었을까? 출 33장은 그들이 시내산을 떠나 길을 행할때, 여호와께서 친히 함께 가리라 (출 33:12절 이하)라는 말씀과 구름이 백성들 앞서서 길을 안내하였다는 말씀 (민 9:15절 이하)이 있다. 이로 보건데, 광야 40년 여정중 길의 안내자, 길의 개척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하나님이셨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길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었다.

 

성서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들과 함께 메시야의 길을 소개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요 1:23)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광야에서 예비하였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의 유대 사회는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였기에, 그가 도심지 한복판에서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백성들의 대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세례 요한이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다는 유대 광야는 당시 종교와 정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그가 만일 여리고 주변 유대 광야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다면 거리상 약 30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이었고, 여리고 동편 요단강 근처 베다니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다면 이보다 약 5 킬로미터 정도 더 떨어진 곳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과 유대 여러 동네에서, 그리고 심지어 갈릴리 바다 근처 (세례 요한의 사역지로부터 약 140 킬로미터 떨어진 곳/ 세례 요한은 살렘에서 가까운 "에논"에서도 사역을 하였는데 이곳은 벳샨에서 약 10 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지역이며 갈릴리 바다 근처 벳세다에서는 약 5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서도 세례 요한을 찾아왔다.

 

 

사진: 유대 광야 - 지워진 이정표만이 서 있다.

 

그 메시야의 길은, 세리들과 군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조차도 세례 요한에게 그들의 추종자들을 보내었다. 그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시야 되시는 예수께서 그가 예비한 길을 따라서 요단강에 오셨다. 메시야가 오신 곳, 메시야를 만난 곳은 도심지 한복판이나 당시 종교인들이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여겼던 성전산이 아닌 거친 광야였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화려함을 자랑하였던 성전산의 성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들을 수 없었던 생명의 말씀이 있는 현장 광야. 그 광야로 그 생명의 메시야를 찾아 사람들은 몰려 들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교회들은 어제의 흔적만을 자랑하는 교회들이다. 무너질 성들을 건축하였던 이들처럼, 많은 교회들 역시 무너졌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 글에서 말하는 교회는 외관상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다행히도 그 무너져 버린 교회들속에서 우리는 생명있는 복음을 찾고 만난다. 교회 건물은 "성"과 같으며 교회의 복음은 "길"과 같은 것이다. 만일 교회에 그 복음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이며 결국 무너진다. 교회가 성처럼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을 보이려 한다면, 역사가 던져주는 무너져내린 성들, 먼지 구덩이속에 파묻혀버린 성들의 역사를 주목해야 한다. 성은 무너졌다. 무너진 성들은 어느 정도 찾는이들에게 감동을 주지만, 복음이 없어 무너진 교회들은 이미 생명을 잃었기에, 유통기한이 지난 썪은 우유와 같은 것이다. 그 누구도 어제의 날씨를 보고 내일 입을 옷이나 우산을 준비하지는 않는다. 복음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과연 우리는 복음이라는 길을 만드는 예수의 사람인지, 복음을 잃어버린, 혹은 그 복음을 잃어가는 교회 건물만을 자랑하는 예수의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