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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Story

웃사의 죽음을 통해 보는 부끄러운 리더십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6-7). 


왜 웃사는 죽임을 당하였을까?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이십년 동안 머물던 법궤 (삼상 7:2)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기던중 소 달구지에 실고 가던 법궤가 소의 날뜀으로 인해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는 법궤를 붙잡았다. 그는 아마 법궤를 보호하고자 붙잡았을텐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속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여러번 읽고 또 읽어보아도 웃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에 대해 속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법궤는 레위인 (고핫 자손)이 메도록 규정되어 있으므로 (민 4:15), 레위인이 아닌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가 법궤를 만진것도 문제가 있고, 법궤를 레위인이 메지 않고 소 달구지로 옮기려 하였던 것도 문제가 된다. 고로 율법에서 금하는 잘못된 행위를 하였기에 웃사가 죽는것은 당연하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뭔가 찜찜한 것을 지울 수가 없다. 적어도 웃사가 손을 내밀어 법궤를 잡으려 하였던 것은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즉시 죽이시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웃사의 죽음! 어쩌면 법궤 운반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이 불행한 사건에서 성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하심속에서 죽어야만 했던 웃사가 주된 이야기의 초점이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먼저 법궤의 이동에 대해 정리해 보자. 사사 엘리 시대 당시 법궤는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실로에 있었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를 할때 법궤를 실로에서 가져갔다가 전쟁에서 질뿐 아니라 법궤까지 빼았겼다. 삼상 4장4절에는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וישלח העם שלה וישאו משם את ארון בירת יהוה צבאות ישב הכברים (그 백성이 실로로 보내어 그곳으로부터 그룹들 사이에 앉아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다) 라고 되어 있다. 레위인이 법궤를 옮겼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법궤를 전쟁터에 가져오면 승리가 따라올줄 알았으나 오히려 전쟁을 이끌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음을 당하였고 법궤까지 빼앗긴 것이다 (삼상 4:11). 사실, 이 전쟁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부정과 타락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들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삼상 2:34). 결국 법궤를 빼앗기게 된 것 역시 타락한 리더십이 그 근본 문제였다. 


법궤가 블레셋 다섯 지방에 머무는 동안 독한 종기와 재앙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역에 미쳤다. 결국 이스라엘 신의 궤로 인해 사망의 그림자속에 들어가자 그 법궤를 다시 돌려보낸다.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한번도 멍에를 매어 보지 않은 두 마리의 소에 수레를 메우고 법궤를 실어 단지파의 땅인 벳세메스로 법궤를 보낸다 (삼상 6:1-12). 


삼상 6장 13절에 의하면, 벳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던 중 블레셋 지역으로부터 소가 법궤를 끌고 오는 것을 보고 레위인이 법궤를 내려 큰 돌 위에 두고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린다 (삼상 6:15). 이후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안을 들여다 보다가 칠십 명 (혹은 오만 칠십 명)이 죽음을 당한 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법궤를 가져가라고 요청한다 (삼상 6:19-2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가져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를 두고 엘이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는데, 법궤를 벳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길때에 레위인이 옮겼다는 텍스트의 증거는 없다! 아무튼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이십년간 보관되었고 그 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운반하고자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만명을 모아 아비나답의 집으로 온다. 삼하 6장의 이야기를 다룬 대상 13장에는 다윗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기록도 있다. 




사진: 법궤를 메고 가는 레위인들 (예루살렘 마밀라 거리 조각상)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과정을 보면 그가 매우 흥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삼하 6:5). 법궤를 옮기는 작업은 아비나답 혹은 그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진두지휘할 수 있거나 해서는 안되는 중대한 일이었다. 아효는 소 달구지를 몰고 웃사는 법궤 옆에 서서 걸었지만, 이 모든 일을 지휘 감독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다윗이었다. 대상 13장에 의하면 법궤를 옮기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 인물은 바로 다윗이었고 삼하 6장에서도 다윗이 법궤 옮기는 일에 앞장섰다. 그렇다면, 다윗은 신중하게 법궤 옮기는 일을 준비했어야 했다. 삼만명이라는 거대한 인원을 동원하는 것보다, 온갖 악기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면서 기뻐 춤추며 법궤를 옮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법궤를 어떻게 옮길것인가에 대한 준비였다. 


레위 사람이 직접 법궤를 매고 옮기라는 성서의 명대로, 다윗이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나 아효, 그리고 말못하는 짐승인 소가 아닌 레위 사람에게 법궤를 직접 메고 옮기도록 하였다면 소가 날뛰거나 웃사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명기 17장에 의하면 왕이 할 일은 전쟁 준비가 아닌 율법을 등사하여 그 율법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다. 다윗은 법궤를 운반하는 성서적 방법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었어야 했다. 다윗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행하였던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도 마찬가지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백성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리더들이 아니던가? 


다윗과 삼만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는 사이, 소는 날뛰었고 소 달구지 위에 위험스럽게 실려있던 법궤는 흔들거리다가 결국 떨어질 찰나였다. 웃사는 순간적으로 그 법궤를 잡았다. 성서 저자는 분명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셨다고 말한다.


ויחר־אף יהוה בעזה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셨다!)


ויכהו שם האלהים על־השל (그 하나님께서 그 실수로 인해 그를 치셨다). 


성서 저자가 선택한 단어 של은 그 뜻이 매우 애매모호하다. 이 단어는 삼하 6:7에 단 한번 사용되었다. 성서 사전 HALOT에 의하면 של(쌀)은 아카드어의 "무례함, 건방짐," 혹은 "모독적인" 이란 단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웃사) 치셨다 를 뜻하는 ויכהו 에서는 웃사를 지칭하는 3인칭 단수 접미사가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이유의 표현인 전치사 (על) + 명사 (של) 다음에 3인칭 단수 접미사, 즉 웃사를 가리키는 접미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의(웃사) 실수 (혹은 무례함, 건방진 행위)로 인해 웃사를 치셨다" 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실수로 인해 (혹은 그 무례한, 건방진 행위)로 인해 그를 치셨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웃사를 지칭하지 않고  "그 건방지고 무례한 행위로" 인해 웃사를 치셨다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은 후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나팔 소리는 사라졌고 춤은 멈췄다. 성서 저자는 이어지는 구절인 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한글 성서에서는 "다윗이 분하여" 라고 번역을 하였지만 원문의 의미는 이와 조금 다르다. 히브리어 원문의 전치사 ל + דוד 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전치사 ל 는 of, to, for, belong 등등의 의미가 있는데 만일 다윗이 주어라면 굳이 전치사 ל 와 함께 쓸 이유가 없다. 어쩌면 "It is displeasing to David" (이것이 다윗에게 화를 불러 일으켰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듯 하다. 웃사의 죽음이 다윗을 분노케 하였는데, 법궤를 옮기는 축제의 분위기가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망쳤기 때문에 다윗은 분노하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경솔한 준비와 성서의 명령에 무지한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일까? 결국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으로 메어가지 않고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동안 보관한 후 다시 다윗성으로 가져간다. 13절에 의하면 두번째 법궤를 옮길때 다윗은 더 이상 소 달구지가 아닌 사람들이 직접 법궤를 메고 가도록 한다. 분명 다윗은 자신의 성서적이지 않았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가 아닌 사람들이 법궤를 메도록 하였던 것이다. 


웃사의 죽음은 한 개인의 실수만으로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웃사도 법궤 운반과 관련된 성서의 명령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다윗, 그리고 그와 함께 하였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더더욱 자유롭지 못할뿐 아니라 웃사의 죽음에 대한 연대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 운반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다윗을 직접 치시지는 않으셨다. 현장 책임자인 웃사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었지만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즉각적인 징계는 웃사를 넘어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향한 것이었다. 


웃사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내가 까다로운 신학적인(???) 질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자료들을 찾고 읽어보니, 모든 초점이 웃사에게 맞춰져 있거나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진노하셨고 웃사가 마땅이 죽어야할 벌을 내리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변호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변명이나 변호로 그분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받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웃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웃사에게만 돌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진노의 화살을 쏘셨다는 것이 성서 저자의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성서 저자는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의 리더십 부재의 연속선상에서 사울과 다윗의 리더십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연약하고 무지하며 연대 책임을 지지 않는 리더십의 문제를 지적한다. 웃사의 죽음 앞에서 다윗은 분노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했어야 한다. 한 아들을 잃은 아비나답 앞에 그는 용서를 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단 선지자처럼 "당신이 잘못이요!" 라고 다윗 앞에 당당히 서지 못했다. 다윗 스스로도 책임지는 리더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웃사의 죽음과 분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분노하는 리더십속에서 오늘날의 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본다. 많은 무리가 모이는 축제 분위기가 있고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며 찬양하며 승리를 자축하는듯한 우리 교회. 그러나 그 축제 가운데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그 조그만 산골 동네인 기럇여아림에 삼만명이라는 거대한 군중이 운집해 있었지만 그 안에 "성서의 명대로" 법궤를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는 없었다. 한 인생이 죽었지만 누구도 그 인생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진노하심속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당연시할 뿐이다! 그러나 "성서가 명하는대로"의 리더십이 죽어 있기에 한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속에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정치 세계에서 일어나는 꼴불견같은 일들을 보면 문제는 터지지만 책임지는 리더십은 없는 것을 흔히 본다. 비단 정치 세계뿐 아니라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마땅히 책임지는 손을 들려 하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부실한 리더십으로 인해 복음이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 (삼하 6:13)! 웃사 사건 석 달뒤 다윗은 소 달구지가 아닌 사람들이 법궤를 메도록 하였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성서가 명하는대로"의 리더십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 교회도 "석 달"뒤 성서가 명하는대로의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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