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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신명기 학파의 신학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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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갈릴리 바다의 새벽

기원전 622년 남유다 요시아 왕이 행한 종교 개혁을 두고 학자들은 흔히 요시아의 개혁이라고 칭하지만 좀 더 정확히 한다면 신명기적 개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요시아의 개혁으로 인해 이스라엘 종교는 전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종종 무시를 하고 지나치지만, 성전 수리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대제사장들중 하나였던 힐기야가 중요한 두루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그 두루마리를 "율법책 (세페르 하토라) (왕하 22:8)라고 부른다. 훗날 역대기상 34:14에서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면서, 그 두루마리를 "모세에게 준 주님의 율법책" (세페르 토라 야훼 베야드 모쉐)라고 칭하였다. 모든 학자들은 이 책 (혹은 좀더 분명히 하자면 두루마리)은 모세오경의 다섯번째 책인 신명기의 초기 버전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신명기라는 명칭은 헬라어에서 온것으로 그 의미는 법에 대해 두번째로 말하는 것이다. 그 명칭이 적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신명기가 다른 모세오경의 책들에 포함된 법과 역사를 모세의 마지막 유언 메시지로 반복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두번째 이야기에는 몇가지 급격한 변화들이 있다.

신명기는 신앙과 예배 그리고 사회적 윤리적 가치 측면에 있어 중요한 변화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로 가득한 충격에 대해서는 좀더 일찍 기록된 비-신명기적 텍스트들과의 병행 비교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요시아의 개혁은 예루살렘 성전 중앙화 예배에 주 관심을 갖고 있다.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제단들은 제거되고 파괴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중앙화 자체는 완전히 쓸어버리는 식의 혁명적 혁신이었다. 지방 도시에서 사역을 하던 레위인들은 개혁 이후에 그들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인간적 혹은 정치적 고려이든, 신명기적 입법자들은 지방에서의 레위인 지위를 박탈하고 예루살렘에서만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동일한 분배를 받도록 하였다 (신 18:6-8), 그리고 지방 레위들은 예루살렘의 거룩한 절기들과 증여들의 이점을 받도록 하였다 (신 12:12, 18, 14:27, 29, 16:11, 14).

더 중요한 것은, 정해진 장소, 즉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하고는 희생제사 드리는 것을 금하였다. 희생제사는 고대 모든 종교들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요시아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지방에서의 이스라엘 종교 행위는 희생제사에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종교적 예배의 빈 공간은 기도의 책의 종교로 채워졌다. 따라서 예배는 희생제사라는 전통으로부터 일종의 추상적인 예배형태로 전환이 되었다. 예루살렘에서의 희생제사 행위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희생제사의 제거는 요시아의 개혁때 이미 그 첫걸음을 땐 것이었다.

이스라엘 종교가 좀더 추상적 종교 행위로 전환된 것은 신명기에 나오는 법들에서 또한 볼 수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중앙화와 함께, 신명기에서 우리는 제의적 확대보다는 그 자체를 축소시키고 파괴하려는 노력을 볼 수가 있다.

신명기는 반복적으로 성전을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려고 선택하신 장소라고 언급한다. (신 12:11, 12:21, 14:23-24, 16:2, 6, 11, 26:2). "그의 이름을 거하도록 하는" 이라는 표현은 신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신이 신전안에 함께 거한다라는 일반적인 고대신앙에 반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신이 아닌 신의 이름이 신전에 거한다는 표현이 조금의 일탈도 없이 일관성있게 나온다. 이것은 신명기에서뿐 아니라 모든 신명기적 문서들의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신다" 라든가, "건물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는 예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항상 성전은 "그의 이름이 거하는 곳" 그리고 건물은 항상 "그의 이름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삼하 7장에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성전을 세울 사람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학자들은 나단의 메시지를 선-신명기적 텍스트 (Pro-Deuteronomic text)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나단의 메시지에는 "이름" 신학 (name theology) 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가 내가 거할 처소를 만들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나온 이후 나는 세워진 집에 거하지 않았다" (삼하 7:5-6)고 하신다. 하지만 뒤 따라오는 구절들은 신명기학파의 것이다. 다윗의 성전 건축 문제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것을 보게 된다 (삼하 7:13). (이것이야말로 실질적인 대조로서 고대 예언은 하나님을 위해 영구한 처소를 만드는 것을 고려하였다.)

비슷하게, 성전 건축에 대한 원 기사와 하나님을 위한 처소에 대한 헌신의 메시지가 나오는 고대 이야기는 (왕상 6:1, 2, 8:13), 신명기 저자(혹은 편집자)와 함께 항상 성전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짓는다라고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상 3:2, 8:17, 18, 19, 20, 44, 48).



이 신학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성전 봉헌시 솔로몬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도서는 신명기적 글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 기도에 보면 성전은 하나님의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장소이다. 솔로몬은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들려지기를 간구한다. "당신이 거하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왕상 8:43).

주님을 부름에 있어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갈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지은 처소를 향하여 기도할때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 8:44- 45)라고 간구한다.

신명기적 텍스트에서, "당신의 거하는 장소"라는 표현이 나올때는 항상 "하늘" 이라는 단어와 함께 나타난다 (왕상 8;30, 39, 43, 49). 신명기학파는 기도로 여는 고대 노래에 이 관점을 분명하게 적용하였다 (왕상 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이 고대시에서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로 언급한다. 신명기학파는 이 개념을 바꾸려고 시도를 하고 이 시가 갖고 있는 원 정서와 씨름을 한다. 이 신학적 수정- 즉 "하늘에서" 라는 어구를 첨가함으로써- 은 신명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명기 26:15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였을때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기도는 주님께 다음과 같이 간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하늘에서" 라는 어구를 추가한것은 "거룩한 처소"를 성전으로 연상하는 과오를 막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신이 천상에 거한다는 추상적인 관점은 신명기 학파의 시내산 계시 사건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출애굽기 사건에서, 주님은 실제적으로 산에 내려오셨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 19;18,19). 하지만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현현이 눈에 보여지는 것에서 들려지는 것으로 바뀐다. 하나님 자신은 하늘에 남아 계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신 4:37)

신명기 이전 텍스트들은 신과의 조우 사건의 위험성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말을 한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이와 비슷하게 창 32:31에서, 야곱이 밤새도록 누군가와 씨름을 한 후에 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고 그 장소를 브니엘 즉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창 32:30)라는 의미를 담아 부르게 된다.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신을 직접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소멸하시는 불"(신 4:24)을 본다. 한편 하나님 자신은 천상에 머물러 있는다. 신명기에서의 위험은 신을 보는 것이 아닌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조차도 위험하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신 4:33. 5:23).

전통적으로 신의 형상을 유형으로 표현하는 것을 제거하는 신명기의 노력은 법궤에 대한 신명기의 개념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법궤는 단순히 율법을 보관하는 함이 아닌 하나님의 보좌의 한 부분으로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시고 법궤는 하나님의 발등상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두 그룹이 법궤위에 있었으며 (출 25;18-22) 법궤는 신의 마차 혹은 보좌의 외관이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신명기는 신이 성전이 아닌 하늘에만 거한다고 주장한다. 비-신명기 텍스트들 가운데서 우리는 법궤와 그룹이 신의 보좌로 언급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 80:1,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또한 사 37:16, 왕하 19;15, 삼상 4:4, 삼하 6:2)라고 노래한다.

신명기 이전 텍스트에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민 10:33-36에서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에서 광야로 이동하도록 이끈다. 또한 법궤는 하나님의 적들을 흘어지게 한다. 그러나, 신명기에서 법궤의 구체적인 기능은 언약의 돌판이 들어 있는 보관 장소로 나오며 그룹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신명기에서 주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의 전투중에 그들을 인도하신다. 하지만 법궤는 이와 관련되지 않는다. 민수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한 본문을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의 땅을 향해 갈때 하나님의 지도하심에 정반대의 결정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동편 길을 돌아가서 여리고를 공격하는 대신에 남편길로 가려고 시도를 한다. 그들은 호마르라는 곳에서 패배한다. 이 패배와 관련하여, 민수기 텍스트는 언약의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민 14:44),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패배와 관련이 있다. 신명기에 나오는 호마르 패배는 법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신 1;42-44)

이와 비슷하게, 신명기 이전 텍스트인 삼상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아펙 (에벤 에세르)으로 가져와서 블레셋과의 전투를 한다. 법궤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소리를 외치게 되고 블레셋은 두려움에 떨게 된다 (삼하 4:7).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진영가운데 임재하신다. 하지만 법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신 23:15).

신명기는 또한 이스라엘 신학에서 천사를 제거한다. 이 역시 다른 네권의 토라와 신명기 사이의 극명한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 23:20-23에서, 예를 들면, 주님께서 그의 천사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출애굽기 본문과 병행하는 신명기는 천상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제거한다 (신 7). 반면 하나님께서 천사의 기능을 대신 수행한다.

동일한 비교를 출애굽 여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 20:15-16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에 이르러 이집트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천사를 보내 그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을 회상한다. 신명기는 그렇지 않다.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신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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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사렛 전경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요시아의 개혁이후 희생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도록 제한하였다. 하지만, 신명기는 제사의 중요성을 바꾼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사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제사는 신에서 감사를 표하는 한 방법에 불과하다. 신명기에서 우리는 번제의 향기를 기뻐한다라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한다. 레 1:9, 13, 17, 21:6, 8, 17, 21에서처럼 "하나님의 음식" 이라는 언급도 없다. 본의 아니게 지은 죄, 제의적 블결과 관련된 속죄제 (레 4-5)에 대한 언급도 없다.

신명기에서는 희생제사보다 기도로 죄를 속죄한다. 따라서 미결로 남겨진 살인에 대한 공동체의 제의적 속죄 ( 신 21:1-9)는 어린 암 송아지의 목을 꺽고 공동체의 장로들이 그들의 손을 암송아지 위에서 씻으며 다음과 같이 선포를 한다.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이 의식은 다른 네권의 토라와 신명기 사이의 희생의 다른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피뿌림과 함께 짐승을 살육하는 것이 주 내용이 아니다. 다만 암송아지를 계곡으로 끌고 가서 그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다. 비록 제사장이 입회하지만, 의식을 진행하는 것은 제사장이 아닌 동네의 장로들로 그들이 암송아지의 목을 부러뜨린다. 제사장의 기능은 단지 의식을 진행하는 진행자로 종교적인 보증를 서는 것 뿐이다. 장로들은 그들의 손을 씻는 정결 의식을 통해 그들의 무죄함을 표현한다. 아사셀 의식처럼 (레 16:21) 손을 암송아지의 머리에 올린다든가 죄를 전가하는 의식도 없다. 죄의 사함은 그 어떤 제사장의 중재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속죄 표현과 비교해 보라.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를 할 것이다")

신명기에 의하면 희생은 제도화된 의식이 아닌 개인적인 것으로 두 가지 원리를 지니고 있다. 첫번째는 인도주의적 측면으로 희생제물로 바친 고기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것이다. 두번째는 맹세의 예물을 드림으로서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개인적인 종교적 의무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신 12:6, 11, 17, 26, 23:22-24). 신명기는 사회 공동체적 희생제 -성전 예배의 원리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매일 그리고 절기별로 드리는 제사들-에 대해 그리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신명기는 성전에서의 매일 제사 의식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기적으로 드리는 희생 제사를 무시한다.

신명기적 희생 제물은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제물을 노예,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 고아 그리고 과부와 나눌 수 있었다. 제물에 관해 신명기는 이렇게 명한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신 16:11). 이에 따르면 제물을 드리는 원리적 목적들에는 이스라엘 사회속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다. 신명기 자체는 절기를 기쁨 넘치게 보내는 방법은 가난한 자들과 나눔을 통해서라는 것을 암시한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한다.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 16:12).

이와 비슷한 주제를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인 안식일에 대한 신명기의 규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명기의 안식일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명령과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시고 제 7일째 되는 날 쉬셨다 (출 20:11, 31:17)는 것을 근거로 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날 쉬셨다는 것을 근거로 사람에게 안식일을 쉬도록 제정을 한 것이다. 출애굽기의 안식일 법 제정처럼, 신명기에서는 남종과 여종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안식일날 쉬도록 명한다. 하지만 신명기의 안식 이유는 다르다. 즉 하나님께서 제 7일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에 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신 5:15)가 바로 안식의 이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종들에게 쉼을 공급하기 위해서 안식일날 쉬도록 명을 받았다. 이런 사회적 동기는 종교적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짧게 말하면, 신명기에서도 안식일을 명한다. 하지만 출애굽기의 창조 사건과 관련은 없다. 비록 사회적 동기가 종교적 측면과 함게 하지만, 이 둘은 자연스럽게 공존을 한다.

신명기의 신학, 그리고 법과 이전 텍스트들 사이에는 이 밖에도 여러 다른 점들이 있다. 신명기는 십일조의 문제, 유월절 희생, 노예법, 안식년, 도피법 혹은 국가적 거룩함을 항상 추상적, 도덕적, 합리적 심지어 민주적으로 다룬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종교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학적 혁명이라고 불려도 지나친 과언이 아니다.


Translated from Moshe, Weinfeld. "Deuteronomy's Theological Revolution." Bible Review, Feb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