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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iary

긍휼의 때

   예루살렘 구도시내 유대인 거주지에 있는 서쪽벽 (일명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얼마나 이들이 성전의 재건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서쪽벽에 가면 정통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은 그들에게 충분히 주목받을것 같지만, 수십년 동안 서쪽벽을 방문하는 수 많은 이방인들을 만나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에게 이들은 더 이상 낮선 방문자가 아닙니다.


사진: 구도시내 유대인 거주지에서 책을 읽는 종교인과 그 옆에서 구걸을 하는 유대인.


       유대인들은 여전히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주후 70년 이후, 그 무너진 성전을 재건해 줄  메시야를 그들은 기다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들은 서쪽벽에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를 드립니다. 통곡의 벽에서 만난 한 정통 유대인은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의 메시야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메시야가 있다! 당신들의 종교를 존중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이 믿는 메시야를 전하지 말라” 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또 다른 정통 유대인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면 왜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들은 여전히 무너진 성전이 재건될때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진: 구도시내 호르바 회당과 모슬렘 사원 첨탑. 일설에 의하면, 호르바 회당이 3번 무너졌다 3번 재건되면, 제 3의 성전을 지을때가 도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르바 회당 재건을 마친 후에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유혈 충돌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현대 유대인들처럼, 과거 2천년전 제자들도 승천 직전의 예수께 진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까?” 제자들도 ”땅의 회복”을 기대하였습니다. 땅의 회복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독립을 그 뒷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땅의 회복을 그토록 염원하였던 제자들처럼 오늘날 유대인들의 가슴속에는 수천년의 역사가 남긴 분열과 분쟁, 상처와 아픔 그리고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없는 회복은 늘 흉한 상처만을 남깁니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는 복음의 증인되라 (행 1:8)는 말씀만을 남기시고 승천을 하셨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복음이 증거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진: 성전산과 예수께서 승천하신 올리브 산이 보입니다. (올르브 산에 있는 첨탑은 러시아 정교회입니다)



         오늘날 복음 증거의 큰 장애물은 국제 관계, 혹은 정치적 시각으로 선교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주변 중동 국가들과 그리고 팔레스타인과의 관계 및 정치, 분쟁, 종교 마찰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늘 이스라엘은 새로운 뉴스거리로 넘쳐납니다.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미움과 증오로 연결됩니다. 세상의 시각은 절대로 이스라엘의 현 상황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다른 중동 국가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세상은 중동의 국가들을 향한 비난의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시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혼의 향한 긍휼을 바닥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사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혼을 향한 긍휼 대신에 미움과 증오 그리고 시기를 갖게 하고 결국 영혼들을 향한 눈물을 메마르게 하고 구령의 열정을 식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직전 올리브 산에서 그를 환영하던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은, 며칠 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칠찌라도, 그들의 영혼을 향한 긍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향한 긍휼이 아닌 비판과 판단 그리고 증오와 미움으로 이 세상의 영혼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미 사단의 덫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겸손히 영혼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현장에서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향한 돌 팔매질은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할 수는 있으나,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이 주님의 긍휼로 우리는 선교지의 영혼들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설령, 그 안에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혹은 인권 탄압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긍휼의 마음을 갖고 품어야만 합니다.


사진: 성묘 교회입니다.


        창끝 (The end of Spear)" 이라는 영화에서 아우카 부족 선교를 떠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아빠 만일 아우카 부족이 창으로 공격한다면 아빠는 총으로 그들을 공격할 것인가요?” 아들의 질문에, “아들아! 아빠는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단다. 그래서 아빠는 그들에게 총을 겨눌 수 없어!” 라고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긍휼이 필요한 때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연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크신 긍휼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마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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