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구도시내, 유대인 지역과 무슬림 지역의
경계가 된 서쪽벽 (일명 통곡의 벽) 은 남자와 여자가 들어가는 입구가
구분되어 있다. 여자들은 서쪽벽 왼편에 위치해 있는데, 그 여자들이
기도하는 장소 왼쪽으로 지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고고학 발굴을
하던 장소가 보인다. 한때는 이 발굴 현장을 놓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충돌이 있기도 했는데,
무슬림들은 이 발굴이 이슬람 사원인 알악사 사원과 가깝기 때문에 발굴을 통해 사원을 위험하게 한다는 이유로 발굴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 발굴 장소 아래쪽으로는 오펠 가든이 있다. 예루살렘 성문들
중 “분문”을 빠져 나가면 다윗성 (the city
of David)이 있는데, 이 다윗성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시온성을 빼앗은
이후에 자신의 도시를 만든 현장이다. 다윗 당시의 도시 규모는 대략 성내 거주민이 2,000명 정도가 거주할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 이후, 솔로몬
시대로 넘어가면서 도시 확장 공사를 하여 현재의 성전산쪽을 개발하였고 성전산에 1차 성전을 건축하였다.
성전 공사의 현장이었던 성전산은 평평한 곳이 아니었기에 평탄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헤롯이 성전 확장 공사를 하면서 2차 성전을 두배 정도로 확장할때 그가 한
일중 하나가 바로 성전 주변에 플라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즉 높고 낮은 산을 깍고 돌을 까는 평탄 작업을
하였는데, 이때 바로 서쪽벽(통곡의 벽)은 성전과 평탄 작업을 한 플라자를 지탱하는 웅벽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진: 오펠 가든 안쪽의 2차 성전 시대 당시의 도시 도로. 사진 안쪽이 바로 발굴 현장이다.
다시 발굴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발굴 현장은 여러
시대의 모습을 볼수 있는데, 첫번째는 주전 8세기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현장이다. 아마 히스기야 이전에는 이 서쪽벽과 연결되는 이 발굴 현장은 도시의 성 외곽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현재의 서쪽벽은 헤롯 당시의 것이지, 1차 성전 시대의
것이 아니다!) 그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한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거 남유다로 이주해 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당시 국제 정세가 불안하고 앗수르는 호시탐탐 남유다를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결국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려할 즈음에 히스기야는 급히 도시 확장 공사를 감행하여 현재의 시온산 주변과 유대인 지역중 “확장된 성벽”이 있는 곳까지 성벽을 쌓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쪽벽은 도시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확장된 성벽 (the Broad Wall)은 성서 고고학적으로 1차 성전 시대 당시의 예루살렘 크기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던 최소주의자와
최대주의자 사이의 결전에 최대주의자의 손을 들어준 고고학 발굴이기도 하다.
사진: 가브리엘 발카이 교수
가브리엘 발카이 교수 (히브리대
로스버그 대학원)가 수업중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흐만 아비가도는
케서린 케더린 (영국 여 고고학자, 여리고와 예루살렘을 발굴함)과 함께 예루살렘의 크기에 대해 최소주의자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학자들이었는데, 1967년
6일 전쟁 이후 구도시내 유대인 지역의 발굴을 진행하다가, 아비가도는 히스기야 시대
당시에 건축한 “확장된 성벽”을 발굴하게 되었다. 이 성벽은 자신이 주장하던 1차 성전 시대 당시 예루살렘의 크기는 다윗 성과 성전산 주변뿐이라는
것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학자의 양심에 따라 죽기 전에 최소주의가 잘못되었으며
1차 성전 시대 당시에 예루살렘의 크기는 시온산 주변까지도 확장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케서린 케더린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진: 유대인 지역내의 The Broad Wall
또 다시 발굴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발굴 현장은 8세기 이후 주로 상류층이 거주하던 현장이었고, 훗날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할때까지 사이에
남아 있던 유물들 중에는 인장들과 사람과 동물 형상의 장식물 혹은 주술적 행위를 위한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바벨론 침공, 그리고 포로기 이후에는 아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훗날 하스모니안 (주전 167-37년)
시대와 헤롯 왕가 시대 (주넌 37년 –
주후 70년) 사이에 이 주변에는 미크베
(제의적 의식을 위한 정결 의식탕)들이 있었다. 현재도 오펠 가든을 통해 이 발굴 현장 주변을 들어가 보면, 미크베들이 남아 있다.
상류층이 거주하였던 이 발굴 현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형적인 집 구조인 4방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조사에 의하면 위에서 큰 돌들이 떨어져서 한번에 집들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돌들이 떨어진 것이 바벨론의 침공때문인지 아니면 지진에 의한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펠 가든 안쪽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예수 시대 당시의 도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도로 바닥은 주후 70년 성전 파괴 당시 위에서 떨어진 큰 돌들에 의해 도로가 움푹 들어간 자국들도 있고 돌들이 쌓여 있기도 하다. 벽 맞은편에는 당시 상점들의 아치형 틀들도 볼 수 있다. 성지를 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들속에서 우리는 역사가 남긴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그것이 무너진 돌무더기일지라도, 그 돌들의 소리지름을 들을 수 있는 복된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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