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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노아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

신약과 구약성경에는 '배(boat, ship) 에 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공생애 사역을 할때 갈릴리 바다를 운행하는 택시 (배)를 타고 이동하였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선교 파송을 받은 바울이 첫번째 선교지인 구브로로 갈 때 배를 이용하였다. 훗날 로마로 압송되어 갈때도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갔다. 

구약 성경에는 '배'를 가리키는 단어로 '오니아' (예. 왕상 9장 26) 와 '스피나' (욘 1:5) 가 사용되었다. 배 (오니아/스피나)는 방향키가 있다. 배는 방향키를 이용하여 남쪽 이집트로, 북쪽 메소포타미아아로 그리고 지중해 건너편으로 오고 갔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배와 관련된 첫번째 이야기인 창세기 6-9장에는 '오니아/스피나' 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테바' 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우리말 성경은 '테바'를 '방주'로 번역하였다. 방주의 사전적 의미는 네모진 모양의 배이다. 하나님은 테바를 건조하라는 명령을 노아에게 주시면서 테바를 고페르 나무로 만들라 하셨다. 테바의 크기를 말씀하셨다. 테바 안에 들어갈 짐승들도 알려 주셨다. 테바에 창문을 만들라 하셨다. 테바에 역청을 바르라 하셨다. 그러나 테바의 방향을 조정하는 방향키는 만들라는 말씀을 하셨다.

창세기 7장 18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ויגברו המים וירבו מאד על הארץ ותלך התבה על פני המים)

히브리어 성경이나 한글 성경의 본문 구절을 보면, 문장의 주어는 노아가 아닌 '테바'이다. 노아가 테바를 조정하거나 제어하지 않는다. 방향키가 없는 테바가 물에 의해 떠 올랐다. 방향키가 없는 테바는 물결에 따라 여기 저기로 이동하였다. 노아 가족과 짐승들은 그저 테바속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방향키가 없는 테바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

창세기 6-9장에 사용된 테바가 다시 등장하는 성경은 출애굽기 2장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였다. 이집트 정부로부터 받고 있는 학대가 극에 달하였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넣으라는 바로의 엄명이 내려졌다. 이 때 레위 여자 요게벳이 출산을 하였다. 3개월 동안 아이를 숨겼다.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 없게 되자 요게벳은 갈대 상자를 만들었다. 이 갈대 상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테바'이다. 요게벳은 손수 만든 테바에 노아의 테바 처럼 역청을 발랐다. 방주 (테바) 가 물에 떠 올랐던 것처럼, 갈대 상자 (테바) 역시 물에 떠 올랐다. 방주 (테바) 에 노아 가족과 짐승들이 들어가 있었던 것처럼, 갈대 상자, 테바안에는 삼개월된 유아가 들어가 있었다. 방주 (테바) 가 물에 떠 다니다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것처럼 갈대 상자, 테바는 나일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방주 (테바) 속의 노아 가족이 테바의 이동에 아무런 것을 할 수도 없었던 것처럼 갈대 상자, 테바 속 3개월된 아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11세기 유대 주석가 이븐 에즈라에 따르면 성경 저자가 테바 라는 단어를 노아의 방주와 요게벳의 갈대 상자에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오니아/스피나'와 '테바'의 공통점은 물에 떠 다닌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테바에는 물길을 저어 가는 '노'와 '방향키'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바가 어디로 가는지를 노아도 요게벳도 결정할 수 없고 조정할 수도 없고  제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단순히 바람과 물결이 이끄는대로 테바는 그저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바다의 파도, 홍수의 물길, 바다의 수면, 동풍을 주장하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욥기서 38장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요나가 탄 배(오니아/스피나)의 사공들은 바다 바람과 파도, 물결을 그들 스스로 제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사도 바울이 탄 로마행 배의 선장과 선원들 역시 방향키를 이리 저리로 돌렸으나 실패하였다. 어부 제자들 역시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그들이 탄 배의 방향을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방향을 원하는 쪽으로 조정할 수 없는 테바를 타고 있던 노아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뿐이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테바가 나아가도록 맡길 뿐이었다. 

요게벳의 가족이 거주하던 고센 지역은 나일 강이 지나가는 나일 델타에 위치해 있다. 나일강은 그 폭이 좁은 곳은 3 킬로미터에서 최대 16 킬로미터 정도가 된다. 고센 지역을 통과하는 나일 강에는 민물과 바다를 오고 가며 사는 나일 악어가 출애굽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살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 지중해로 빠져 나가는 강 중에 나할 타니님 (크로크다일 강, 갈멜산 근처)이 있다. 타니님은 악어 (크로크다일)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물론 나할 타니님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성경 시대 이후이다. 하지만 이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은 나일 강을 빠져 나온 악어들이 지중해를 따라 올라와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나일 악어는 그 길이가 작게는 3미터에서 5미터 정도나 된다. 나일강의 포식자이다. 요게벳은 그 포악한 악어들이 살고 있는 나일 강에 갈대 상자, 테바를 띄었다. 그녀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뿐이었다. 역청으로 갈대 상자를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테바가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그 물속에는 악어들이 우굴거린다. 요게벳의 딸 미리암은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테바를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 할 수 있는 것이 제로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외에 구할 것이 없었다.

방향키 없는 테바 라는 프리즘으로 성경 인물들의 삶을 조명해 보면, 그들 모두의 인생 방향키를 하나님이 잡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영화 기생충의 대사 중) 라는 말처럼 인생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계획대로 된 성경 인물들은 없다. 우르 땅의 아브라함이 부모의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는 것은 그의 스케줄 목록에 없던 것이었다. 야곱이 애굽 땅에서 눈을 감은 것도, 사울이나 다윗이 '나는 훗날 왕이 될거야!" 라는 야망도 그들 계획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이들의 인생 방향키는 하나님이 조정하시고 조절하셨다. 올리기도 하시고 내리기도 하셨다. 성경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모두는 테바의 삶을 살았다. 

모세는 창세기 6장을 기록할 때, 테바 (방주) 라는 단어를 선택 기록하면서, 그 테바의 유일한 방향키는 하나님이 잡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세기를 넘어 출애굽기 2장을 기록할 때, 그의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들었던 갈대 상자 (테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자신의 인생 방향키를 주님께서 잡고 계심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잡고 있을 때 그가 타고 있는 테바라는 인생의 배가 주의 뜻하시는대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광야의 모세에게 나침판을 주지 않았다. 방향도 알려주지 않았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방향키가 없는 거대한 테바속에 들어와 있었다.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그의 눈길을 한번도 떼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시그널이었다. 그리고 훗날 여호수아 시대의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법궤만을 따라가라! 그것이 테바 인생의 방향키이다. 

방향키가 있는 오니아/스피나 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테바 인생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운명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홍수로 물이 불어난 시대, 거친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 숨겨진 암초가 있는 바다, 거센 물결이 몰아치는 삶의 상황속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방향키가 없는 테바속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매일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일 강에 놓여진 갈대 상자, 테바와 같다. 악어 떼들이 달려 들고, 물살의 힘으로 인해 작은 테바는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린다. 방향키도 없다. 그러나 그 테바를 보호하고 이끌고 가는 것은 물살도 바람도 아닌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다들 고백한다. 인생의 방향키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잡고 있을 때 가장 평안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은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