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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iary

큰 울음과 돌아섬의 사이에서

“주기도문” 기독교 최대의 순교자!

    이 슬픈 선언은 16세기 중엽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한 말입니다. 우리는 늘 예배 때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암송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채 60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찰나에 우리는 기도문을 암송한 후 아멘으로 우리의 예배를 마칩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 뜬 “반성하는 주기도문” 의 내용은 왜 마틴 루터가 주기도문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 놓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할 때



“하늘에 계신” 이라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요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 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이라 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진정 나의 고백과 삶으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늘 반복해서 암송하듯, 연말 연시가 되면 교회 예배 때마다 대표기도이든 개인 기도이든 늘 반복해서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와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새해에는 정말로 믿는 자답게 살고 싶다고 기도를 드립니다. 늘 우리는 비슷한 기도를 들어왔고 이제 또 다시 그런 기도를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사기를 읽을 때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제 생활에 투영해 보곤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불순종하면 인간 채찍에 맞고 이리 쫓기며 저리 쫓기는 것이 불을 보듯 뻔 한데도 반복해서 죄를 범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반복해서 죄를 범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큰 울음” 때문이었습니다. 2장 1절에 보면 주의 천사가 “보김” 으로 올라와서 주의 말씀의 도를 멀리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엄중하게 경고를 하고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소리로 울었다”  그래서 그 장소를 “보김” 이라 하였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래 보김은 "보카" 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어댔으면 그 전에는 뭐라 그 장소의 이름이 불렸는지 몰라도 그 이름이 “보김” 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많이 그리고 크게 울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후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울음뿐이었다는데 있습니다.



    반복되는 주기도문과 연말 연시의 회개와 다짐의 기도, 그러나 얼마 지나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죄에 빠져 허덕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사사기가  “보카(울었다)” 라는 동사로 점철된 성경이라면, 룻기는 “쏘브라는 동사가 룻과 나오미의 삶을 인도하는 단어입니다. “쏘브”는 “돌아오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1장 22절은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로 한글 성경에 기록되어 “돌아왔는데”의 주어가 “나오미”이고 “룻”은 나오미를 따라 온 것처럼  나오지만  히브리 성경 문법상 “돌아왔는데” 의 주어는 나오미가 아닌 “룻”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원래 베들레헴에 살다가 모압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나오미가 돌아오다” 라고 하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모압땅에서 태어나 자란 “룻이 돌아왔다” 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경 저자가 후대에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즉 “쏘브” 돌아오다 라는 단어를 통해 룻의 180도 달라진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 23:3절에 의하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과거 400년동안 노예로 살았던 땅 애굽 백성은 삼대 이후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것 (7절)에 반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총회에 들어올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를 한 것입니다.  사실 이 법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여자”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법의 저촉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모압 여자인 룻이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사람이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았을까요? 아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의 고백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6)은 그녀의 돌아섬 (쏘브)가 일시적이거나, 단순한 감정에서 나온 결정이 아닌 진정한 돌아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해가 이제 곧 시작됩니다.  새롭게 주어지는 삼백예순다섯 날에는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까 해서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눅 13:7) 라는 제 삶에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 주님의 책망과 격려가  돌아섬이 없는 큰 울음이 아닌 삶의 돌아섬 그리고 열매가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그리고 주님의 샬롬이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춘석 전도사 가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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