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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미스바 - 나비 사무엘 or 텔 엔-나시베


사진: 나비 사무엘 전경: 멀리 11-12시 방향에 기브온이 보입니다. 



109967일 화요일 아침, 제 1차 십자군 기사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8 킬로미터 떨어진 좁은 산지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하룻밤을 그곳에서 야영을 하였다. 기사들은 그 산지를 "몬스 가우디 - 기쁨의 산" 이라고 불렀다. 길고도 고달픈 3년여의 여정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수세기를 걸쳐서 순례자들은 이 산지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그들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12세기경 "데오도릭"이라는 순례자는 "나비 사무엘"의 전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져 있는 산 위에서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봅니다. 흥분과 기쁨에 못이겨서 그들은 십자가를 앞에 내려 놓고 자신들의 신발을 벗습니다. 그리곤 가난하고도 겸허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곳에 온 자신들을 맞이할 사람을 찾습니다." 


러시아로부터 온 "다니엘"이라 알려진 순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말에서 내려 작은 십자가를 내려 놓습니다. 그리곤 길옆에 세워진 부활교회에서 경배를 드립니다.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성지를 보는 이들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려내립니다. 순례자들은 큰 기쁨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았던 그 산지를 흔히 "나비 사무엘 (선지자 사무엘)"이라 부른다. 이 장소와 관련된 성경 시대의 지명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었다. 


1835년초,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에드워드 로빈슨은 나비 사무엘을 성서의 "미스바"라고 주장하였다. 1930년대초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 역시 나비 사무엘이 미스바라고 주장하였다. 성서에 의하면 미스바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추대한 장소이다. (삼상 10:17-24)



사진: 나비 사무엘과 기브온 (Jib)


하지만 텔 엔-나시베 -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 13 킬로미터 떨어진 산지-를 1920-30년대 사이에 발굴을 통해 성서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후 미스바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현대 지명과 고대 지명의 비슷함 (미스바/나시베)은 텔 엔-나시베를 성서의 미스바로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로 제시되였고, 발굴자들이 그 장소를 미스바로 지칭하기 시작한 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올브라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나비 사무엘이 성서의 미스바라는 주장을 계속하였으며, 훗날 나비 사무엘을 재차 발굴하면서 다시 한번 미스바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성서의 미스바는 나비 사무엘인가 아니면 텔 엔-나시베인가? 


사실, 텔 엔-나시베가 성서의 미스바라는 분명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텔 엔-나시베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은 철기 시대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음성학적으로 지명이 비슷하다는 것 역시 언어학적으로 옳지 않다. 텔 엔-나시베를 미스바로 주장하는 것은 성서 기사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이를 고고학적 발굴물에 접목시킨 것일 뿐이다. 



나는 올브라이트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 


미스바는  기브온, 라마, 브에롯, 그비라, 모사와 함께 베냐민 지파가 분할받은 땅이다 (수 18:25 -26). 만일 분할된 땅 목록에 지리적 순서가 있다면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북쪽 끝자락 (텔 엔-나시베)이 아닌 베냐민 지파 땅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성서 텍스트에 의하면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북쪽 경계에 위치해 있지 않다(수18:12-13). 


성서에서, 미스바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행위가 있기전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스바에는 제단이 있었으며 각 지파들이 와서 맹세를 하기도 하였다 (삿 21:1-7). 


또한 미스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의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가 열리기 전,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미스바로 호출하였으며 금식을 선포하고 죄를 회개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사무엘은 어린양을 번제로 바쳤다. 이로 보건데 미스바가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이 틀림없다. 백성들은 제단에 물을 붓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디.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삼상 7:10). 


사무엘이 사사로서 순회 활동을 할 당시 그는 미스바에서도 백성들을 다스렸다 (삼상 7:16). 따라서 초기 역사 기록때부터 미스바는 사무엘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통일왕국시대가 깨어진 후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이 있을때, 유다의 왕 아사는 미스바를 포함한 몇몇 도시들을 요새화한다 (대상 16:6). 


수백년 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후 미스바에 재 정착을 하기 시작하며 미스바 거주민들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돕는다 (느 3:7). 심지어 미스바에는 지방 통치자가 다스렸으며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직접 참여도 한다 (느 3:19). 




Jeffrey R. Zorn는 성서 고고학 잡지 (BAR) 기고를 통해 텔 엔-나시베를 나비 사무엘보다 더 확실한 미스바의 후보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비 사무엘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만일 성서의 미스바로 지정되려면 반드시 철기 시대( 사사 활동 시기 주전 1200 -1000년)의 유물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나비 사무엘에는 이런 유물들이 전혀 없다!" 


조른(Zorn)은 나비 사무엘과 관련된 고고학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장소에 대한 개관만을 고찰한후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직접 나비 사무엘을 발굴하였다. 


어떤 장소이든지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아직 유물 발견이 이뤄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많은 유물들이 있다. 


나비 사무엘 발굴에서 우리는 사사 시대의 유물, 즉 고고학적으로 제 1 철기시대 라고 불리는 시기의 것 (주전 1200 - 1000년)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성서 시대의 다른 베냐민 지파의 땅 대부분 지역에서도 사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제 1차 성전 시대의 많은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주전 1000 -586년). 흥미롭게도, 우리는 1차 성전 시대의 건물이나 성벽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1차 성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급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헬라시대 당시의 거주지 안쪽에는 1차 성전 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전 8세기 후반의 것인 "라멜레크 (왕에게)"라는 문구가 새겨진 항아리 손잡이가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몇몇 헬라시대의 성벽의 기초는 1차 성전시대의 것이었다. 이 모든 유물들은 나비 사무엘이 성서 시대 후기에 가서나 거주지가 되었다는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나비 사무엘은 해발 3000피트의 높이에 위치해 있다. 이 고도 역시 나비 사무엘을 미스바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두개의 샘물이 연중 북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흐른다 - 사무엘의 샘과 한나 (사무엘의 어머니)의 샘이다. 산비탈쪽으로는 유실수, 포도, 그리고 올리브 나무들이 자란다. 또한 산 정상은 고대 고속도로 (해안 평야지역에서 예루살렘 방향 / 사마리아 서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지나는 북-남 도로)를 관측할 수 있는 전망대가 된다. 또한 나비 사무엘은 360도 각도로 모든 지역들을 조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당시, 지명 미스바 (전망하다, 바라보다)라는 뜻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지리적 측면을 고려할때도 나비 사무엘이 미스바의 가장 합당한 추정지가 될 수 있다. 미스바와 기브온은 성서에서 자주 함께 등장한다. 이는 지리적으로 두 지역이 근접한 곳에 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기브온과 미스바 거민들이 함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도왔다 (느 3:7). 나비 사무엘과 기브온 (현대 지명: 엘-지브)는 겨우 1.6 킬로미터의 근거리에 있다. 반면 텔 엔-나시베는 기브온으로부터 거의 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주전 2세기경, 유대인들이 셀루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대항해서 봉기를 들었을때 봉기의 지도자인 마카비는 미스바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은 후에 출정식을 가졌다. 당시 그는 과거 사무엘이 블레셋과의 전투 출정식에서 행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보이는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미스바는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마카비 1서 3:46-470. 텔 엔-나시베를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비 사무엘은 예루살렘 북서족으로 약 8킬로미터밖에 위치해 있지만 텔 엔-나시베는 13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예루살렘을 볼 수가 없다. 


유다 마카비가 미스바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였을때, 그는 먼저 종교적인 의식을 행한후 군사 전략을 세웠다. 안티오쿠스의 군사들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을 해 오고 있었다. 나비 사무엘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한편, 텔 엔-나시베는 예루살렘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적 전략지가 아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군사들이 포진할 이유가 없고 엠마오를 공격하거나 예루사렘을 방비할 수도 없다. 


이미 1차 성전 시대의 몇몇 유물들이 나비 사무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는데, 1차 성전 시대 이후의 고고학적 층으로 페르시야 시대의 층이 발견되었다. 페르시야는 바벨론 제국 다음으로 주전 6세기 경에 세계를 주름잡는 제국으로 발돋음하였다. 페르시야는 유대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내렸고, 유다 땅은 페르시야의 한 지역에 편입되었다. 페르시야 시대 때에 사용되던 몇몇 항아리 손잡이에 "유다"라고 새겨진 것과 몇개의 은동전들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초기 페르시야 시대의 유물이 적게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비 사무엘은 예루살렘처럼 돌을 채석하여 시대를 이어가며 사용하였다. 십자군들은 채석장들을 막고 기념비가 될만한 건물들을 세웠다. 그 결과 후기 헬라 시대 당시의 층이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사실, 유일하게 남아있는 헬라 시대의 건축은 십자군 시대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은 주변 거주지일뿐이다. 헬라 시대의 거주지는 분명히 큰 규모였을 것이다. 건물을 쌓아 올린 벽돌의 크기로 보건데, 아래층의 문설주와 상인방의 크기는 헬라 시대의 건물이 적어도 2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남아있는 집터들중 하나를 보면, 대부분의 방들 주변에 안마당이 있었다. 벽들은 질이 좋은 회반죽으로 칠해져 있었다. 또한 200 피트 길이의 타일로 깔린 헬라 시대의 도로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십자군 건축물이 세워진 곳에서는 헬라 시대의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 돌을 채석하는 방법


나비 사무엘은 주전 2세기말엽으로 가면서 잊혀진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한가지 단서를 제시할 수 있다. 헬라시대의 도시는 시리아에 수도를 두고 있던 셀루쿠스 왕조 당시 세워졌다. 유다 마카비의 봉기는 성공했고 유대인들은 독립국가를 다시 이룰수 있었다. 마카비의 봉기는 주전 2세기 중엽 제사장과 왕권을 동시에 손에 잡은 하스모니안 왕조로 대체된다. 하스모니안의 후계자들은 전쟁을 통해 유대의 지경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나비 사무엘은 예루살렘을 방비하기 위한 전략적 가치를 잃게 된다. 


종교적인 이유 역시 나비 사무엘이 버려지게 된 하나의 이유를 제시한다. 만일 나비 사무엘이 정말로 고대 미스바라면, 그곳은 예루살렘을 방비하기 위한 요세 역할뿐 아니라 고대 종교행위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스모니안 통치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중앙화에 힘을 기울인다. 사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언급되는 그 어느 곳보다 중요한 곳이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다른 모든 성스러운 장소들, 그곳이 하나님을 섬기던, 아니면 이방신을 섬기던 곳이든 다 파괴한다. 하스모니안 통치자들은 고대 미스바를 종교젹 중심지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왕국을 확장하는 가운데, 미스바 (나비 사무엘)을 예루살렘 방비를 위해 남겨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에 결국 미스바는 잊혀진 도시가 된다. 




사진: 철기시대 토기 조각들 - 라멜레크 (왕에게) & 유대 라고 새겨진 조각들



비잔틴 시대 (주후 4-7세기)에 가서, 기독교 수도원이 나비 사무엘에 세워진다. 아마 당시 수도원을 세우던 건축자들은 자신들이 훗날 사무멜의 무덤이라는 전승이 발전하게 된 곳에 수도원을 세운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비 사무엘의 비잔틴 수도원은 선지자의 무덤을 기념하기 위한 의도보다는 사무엘을 기리고 사무엘의 사건과 관련있는 장소가 바로 미스바이기 때문에 수도원을 세웠을 것이다. 


수도원 교회 바닥 아랫편에 있는 동굴이 사무엘의 무덤이 아니라고 믿는 수도원 건축자들은 당시 전통적으로 선지자의 무덤이 다른 어느 곳에 있다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4세기경, 교부 유세비우스는 사무엘의 탄생지와 그의 무덤을 리다 근처 아르마데-란티스 (성서 지명: 라마)라고 말하였다. 5세기초, 제롬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사무엘의 뼈를 트라키아의 칼케돈으로 옮겼다고 제롬은 기록한다. 나비 사무엘에 있는 수도원은 6세기까지 세워지지 않았다. 


비잔틴 시대 사람들은 틀림없이 사무엘과 관련된 기독교 기록물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무엘의 뼈가 트라키아로 옮겨졌다는 전통에도 익숙하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유세비우스의 사무엘 관련 글과, 나비 사무엘이 성경에 기록된 라마, 즉 사무엘의 출생지와 그의 묘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비 사무엘을 미스바로 인정한 것과 그 장소를 사무엘과 관련된 신성한 장소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수도원을 세웠을 것이다. 


수도원은 11세기 아랍 정권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에도 존재하였다. 우마야드 왕조 (7-8세기) 당시의 토기를 굽던 가마에서, 아랍어로 "데르 삼윌" (사무엘 수도원)이라고 스템프가 찍힌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무슬림 지리학자인 알-무카아시 (985년)는 사무엘 수도원을 언급하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헬라어식 발음인 "삼윌" 대신에 히브리어식인 "쉬모엘"을 사용하였다. 13세기, "야쿠트" 역시 "마르 삼위 (마르는 시리아어로 "성인")를 언급하였다. 이 모든 증거들은 나비 사무엘이 사무엘의 무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무엘 수도원과 관련 있다. 


12세기의 예루살렘 지도는 나비 사무엘을 포함한 몇몇 도시들을 언급한다. 지도의 "몬스 가우디 - 기쁨의 산)은 산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산에 있는 교회에는 "마쉬파트"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그곳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는 "비아 아드 시비타템 마쉬포트 (마쉬포트의 도시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의 표시는 나비 사무엘이 바로 미스바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13세기에 마쉬포트로 알려진 장소는 또한 미스바로도 알려졌다. 



사진: 12 세기경 예루살렘 지도


십자군은 산 정상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를 거의 파괴시켰다. 십자군 시대의 성벽 아래쪽에는 수도원 장식을 위해 사용되었던 모자이크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우마야드 시대 당시 잘 보존되었던 수도원의 토기를 굽는 가마에서는 아랍어로 "데리 삼윌" 이라는 스템프들이 찍힌 항아리 조각이 발견되었다. 그 근처에는 수도원에서 만들었던 정교한 포도주즙을 짜는 틀과 그 즙을 답는 저장 탱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수도원의 토기와 함께 많은 동전들이 발견되었다. 동전들의 연대는 4세기경으로 부터 시작해서 10세기경까지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125개 이상의 동전들은 그 연대가 5-6세기의 것이었다. 동전들은 시대의 단절없이 우마야드 시대 (7=8세기), 아바시드 시대 (8-10세기)까지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아마 수도원은 비잔틴 시대와 무슬림 시대 당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였을 것이다. 또한 많은 동전들은 수도원에서 상업적인 행위가 있었음을 증거한다. 큰 물저장고, 포도주틀, 토기를 굽는 가마등은 이 제안을 뒷바침한다. 


고고학적 증거로 볼때 10세기경 파티미드 시대가 열리면서 수도원은 버려진다. 그후 십자군 시대가 들어서면서 수도원을 대신해서 요세가 세워진다. 십자군들이 무슬림 군대을 효과적으로 몰아낸후에 적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무슬림들을 지배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인구수의 불일치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십자군은 성지 곳곳에 요세를 세우고 봉건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때 나비 사무엘의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부상한다. 이미 언급한것처럼, 나비 사무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고, 예루살렘으로 송신을 보낼수도 있으며 서쪽 쉐펠라 지역과 동쪽의 사마리아 지역을 관할할 수 있는 파수대 역할을 할수가 있었다. 


십자군 시대에 나비 사무엘은 전략적 관점을 고려하여 웅장한 요세와 몇개의 망대를 세웠다. 십자군은 나비 사무엘을 "몬스 가우디 (기쁨의 산)"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사진: 비잔틴 시도 혹은 십자군 시대 순례자의 십자가 


나비 사무엘에 있는 십자군 시대의 복합 건물에는 큰 교회와 수도원이 함께 있었다. 1157년 몬스 가우디 교회는 성묘 교회와 함께 최초로 언급된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 교회를 사무엘 교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요세 외곽에는 야영지, 순례자들을 위한 여인숙, 두개의 마굿간 그리고 깊은 물 저장고가 있었다. 요세의 성벽들은 예루살렘 정복을 나섰던 살라아딘에 의해 거의 파괴가 되었다. 십자군 요세와 교회는 산 정상에서 채석한 연석회암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먼곳으로부터 돌을 가져오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1187년, 살라아딘의 예루살렘 정복이 있기 바로 직전, 사무엘 수도원은 무슬림들에 의해 강탈당한다. 당시 수도원에 있던 수도사들은 아코의 성 요한 수도원으로 피난을 간다. 나비 사무엘은 무슬림 요세로 사용되다가 다른 기독교 도시들처럼 의도적으로 파괴된다. 왜냐하면 무슬림들은 만일 십자군이 다시 요세들이 있는 지역을 재정복할 경우 그 남아 있는 요세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2세기, 무슬림들은 십자군 시대의 교회를 모스크로 바꾼다. 그 모스크는 실제 교회의 크기를 축소한 것이다. 모스크의 지하에는 동굴이 있는데 이곳은 사무엘 선지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전승일뿐이다. 



사진: 사무엘의 묘에서 기도하는 정통 유대인


동굴의 천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두개의 작은 방들이 붙어 있다. 동굴 서쪽 끝자락에는 무덤임을 알리는 망자의 비가 새워져 있다. 


원래는 동굴로 내려가는 두개의 계단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랫동안 막혀 있다가 최근 작업을 통해 복구하였다. 동굴은 원래 십자군 시대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십자군 시대 교회의 일부분이며, 그 이전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동굴은 틀림없이 교회의 지하실이었으며 고위 성지자들의 무덤이었다. 이것이 훗날 사무엘의 무덤이라는 전승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Translated from BAR 34:03, May/June 2008N


 Nabi Samwil: Where Samuel Crowned Israel's First King by Yitzhak Ma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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