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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iary

부림절과 기도의 손



사진: 부림절날 예루살렘 "벤 에후다 거리" 전경

1.에스더서의 정경화 문제 

     성서의 정경화 과정중, 신약성서의 야고보서는 그 정경성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책입니다. 심지어 마틴 루터는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나 야고보서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가장 잘 알려주는 귀중한 성서입니다). 신약에 야고보서가 정경성 문제가 있었다면, 구약성서에도 이와 비슷한 성서가 있는데,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정경성 논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에스더서를 평가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제 2 마카비서와 에스더서를 증오한다. 정말로 그 책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좋을뻔했다. 이 책들은 너무나 유대교적이고 이방의 부적절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20세기 에스더서를 매우 비평적으로 평가했던 "파톤"은 말하기를,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혀 존경 받을만한 인물들이 못된다. 도덕적으로 에스더서는 구약성서의 도덕적 기준에 못미치며 심지어 외경보다도 못한것이다." 

랍비 "센드멜"은, "에스더서가 구약의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전혀 슬픈 일이 아니다."

이처럼 에스더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에스더서의 정경성 문제를 짧게 살펴보면: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중에 다른 구약성서 문서들은 발견되었지만  에스더서만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야브네 학회 (Council of Jamnia - 주후 90년)에서 정경을 확정할때 에스더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Orlinsky는 2세기경 랍비들이 "부림절기"를 먹고 마시며 즐기는 절기로 받아들였지만 이는 에스더서가 아닌  "메길라트 타아니트 (Megillat Taanit)" 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Zeitlin 은 에스더서가 정경으로 인정받은 때를 주후 140년에 있었던 "웃사 아카데미"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독교계에서는 두분류로 나눠집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에스더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서방 교회에서는 에스더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에스더서의 정경성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에스더서에 단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반면 페르시야 왕에 대해서는 167절중 190번이나 등장을 합니다. 또한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종교적 표현들 예를 들면, 언약, 선택, 기도, 성전, 예루살렘, 희생제사 등이 부족하거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간접적인 종교적인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신의 섭리 (4:15; 5:1-6), 금식 (4:16), 기도 (4:16)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Gordis 와 Berg 와 같은 학자들은 에스더서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유대 종교적인 표현들을 자제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페르시야의 역사 기록 문학 양식을 따라서 글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적인 향기가 본문상에 묻어나지 않고 있으며, 저자는 인간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통제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Loader는 "에스더서는 선택받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간섭이라는 관점과 인간의 지혜와  결정이라는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2. 모르드게와 하만의 관계 (사울과 아말렉의 관계)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모르드게는 베냐민 지파 사울의 후손이며 하만은 아각의 후손입니다. 아각은 아말렉 자손으로 출 17장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또한 신 25:17-19절에도 비슷한 언급이 나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사사기에서도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민족으로 등장을 합니다 (삿 3:13, 5:14, 6:3, 7:12, 10:12), 사무엘상 15장에도 아말렉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2절). 여호와의 명을 받은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하게 되고, 그 왕 "아각"을 사로잡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아말렉 민족을 전멸시키라 하였으나 사울은 아각을 죽이지 않고 그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결국 아각은 사무엘의 손에 죽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불순종한 사울을 버리게 됩니다. 이 사건에 이어 좀더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무엘하로 넘어가면서 사울과 아말렉 사이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1장1절).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고 있을때 길보아산 전투 (삼상 31장)에서 사울이 전사한 사살을 이스라엘군에서 도망쳐온 한 병사가 다윗에게 전합니다. 다윗이 "네가 어떻게 사울이 죽은 것을 아니냐?"라고 묻자 "내가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 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6-10절). 이 말씀에 의하면 사울은 결국 아말렉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사울의 후손인 모르드게와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 사이의 갈등과 하만의 음모는 결국 모르드게에 의해 하만과 그의 열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됨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진: 이스라엘 여군입니다. "에스테르 하말카 (여왕 에스더) 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을 들고 "모금"을 하더군요.

3. 부림절 

      "에스더서"에 보면 "부림"이라는 절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절기들 (초막절, 유월절, 오순절 - 성서의 3대 절기)을 철저히 지킵니다. 3대 절기뿐 아니라 이스라엘 독립, 쇼아(홀로코스트), 현충일, 식목일 등등 다양한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림절"은 가장 화려하게 지키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르 (3장7절)"는 "제비뽑기"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제비를 뽑는다" 는 "고랄"이라고 합니다. "고랄"은 땅의 분배 (여호수아서), 전쟁 (삿 20:9), 범죄자의 색출 (요나 :7), 예루살렘 거주민 (느 11:1)등을 선별할때 "고랄"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고랄"은 "운명" 이라는 뜻(단 12:13, 시 16:5, 사 57:6, 잠 19:19)도 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단수명사 "부르"가 3번 등장하고 복수형인 "부림"은 5번 등장합니다. 절기의 명칭이 "부르절"이 아닌 "부림절"이 된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처한 운명의 뒤바뀜을 뜻합니다. 즉, 첫번째 "부르"에서는 온 민족이 죽을 운명이었으나, 두번째 "부르"에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을 사용하여 "부림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 하만은 유대인들을 멸하기 위해 날짜를 정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아달월 13일 입니다. 아달월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기 전날 (바벨론 월력으로 "니산")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생명을 위한 탈출이 있었는데, 페르시야 시대에 가서는 유대인들이 동일한 날 아말렉의 손에 의해 죽을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부림절날 화려한 옷이나 만화에 나오는 옷들을 입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이유는 에스더서 5장에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갈때 화려한 왕후의 옷을 입었고 8장에서는 모르드게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어린아이도 빠질 수 없죠. 

4. 안티세미티즘과 부림절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만의 음모를 안티세미티즘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유는, 하만의 개인적인 악감정을 유대 전민족에게 표출했고 민족 말살을 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티-세미티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모르드게와 에스더입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 "300"에서 우리는 에스더의 남편 아하스에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속에서 스파르탄의 300용사와 전쟁을 벌였던 인물 크세르크세스 (Xerxes - 성서에서는 "아하수에로)는 매우 잔인한 인물로 묘사가 됩니다. 사실, 성서에서도 보면 아하수에로에게로 나아갈때 그가 금홀을 내밀지 않으면 즉시 처형을 당할뿐 아니라, 하만의 유대인 학살 계교를 별 생각없이 인준하는 인물로 묘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가 왕에게로 나가기를 두려워했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6)" 라는 각오로 모르드게의 명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진: 영화 300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5. 이방인들의 유대교로의 개종

      유대교는 철저히 배타적인 종교입니다. 타민족을 유대 종교의 종교적 테두리안으로 끌어안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룻기를 보면,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올때 두 며느리의 동행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오르바가 포기를 하고 돌아선후, 룻이 계속해서 나오미를 따라오자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 1:15) 라고 말합니다.  신약성서에도서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행 10-11장에 걸쳐서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과 고넬료의 구원 사건에 대해 믿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습니다 (10:34: 11:3, 18).

      에스더서를 보면 이방인들의 죽음의 두려움속에서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17) 비록 타민족의 개종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개종 자체를 막지 않았고 흔치 않은 예지만 하스모니안 시대에 가서는 네게브 광야 아래쪽에 살던 에돔 족속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엔 헤롯 (유대 왕 -37-4 B.C)왕 일가도 있습니다. 행 2장에서는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 중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 (행 2:10)도 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종교적 윤리와 사회적 규범과 법규 수준이 근동 지역의 다른 종교들보다 높았기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 초등학생들의 변신 

6. 부림절 - 유대인의 구속 

      부림절을 통해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구속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에4:14) 라는 모르드게의 말처럼, 유대인들은 아말렉의 후손 하만의 음모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또 다른 구속이 필요합니다. 비록 이들은 이미 오신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구속 시계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유대인의 구원은 신학적으로 칠년 대환란중에 있을 사건으로 제한하고, 롬 11장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를 유대인의 구원은 이방 선교가 다 이뤄진후에나 있을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작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이방 선교를 하면서 철저히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9장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후 그는 즉시 유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9:20).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 선교의 출발점은 유대 회당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유대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강론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보건데, 유대인의 구속은 내일이 아닌 오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가지 더 분명한 사실은 오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내일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증거는 내일로 미룰 수 있는, 혹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거나 시작해서는 안되는 그런 종류의 사안이 아닙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유대인 구원의 해결 열쇠는 바로 "금식 기도"였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6). 현장 선교를 돕는, 그리고 선교에 가장 능동적으로 동역하는 방법이 있다면 선교 현장을 향한 기도의 손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모세의 아말렉 자손과의 르비딤 전쟁 승리는, 여호수아의 칼이 아닌 산 꼭대기에서 손을 높이 들었던 모세를 통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는 사단의 진을 파하고 죽은 영혼을 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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