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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쿰란 사본은 왜 중요한가?

사진: 성서 시대에 사용되던 무게를 재는 "추"입니다.


왜 쿰란 사본 (사해 사본)은 중요한가?


흔히 사해 사본으로 알려진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일컬어진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구약성서의 택스트가 원래 쓰여진 원본에 충실한 것인지 혹은 수정이 가해졌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고대 성서 택스트가 없었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 학자들은 현존하는 구약성서 택스트가 수정되었는가 라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여 왔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라는 계시의 확장을 위한 성서라는 관점과 예수와 관련된 그 어떤 증거도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입장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1844년, 위 논쟁이 성서의 권위 문제와 더불어 계속되는 사이, 독일 학자 Constantin von Tischendorf 가 시내산에 있는 성 케서린 수도원에 있는 도서관에서 Sinaiticus 코덱스를 발견한다. 이 코덱스는 4세기경에 헬라어로 기록된 것으로 성서의 어려 책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코덱스의 발견과 연구는 시내산의 수도자들과 본 티센도르프, 러시아의 황제등이 결부된 상호 비방과 논쟁 그리고 가십이 있었지만, 코덱스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4세기 이후에 기록된 구약성서 택스트는 오늘날까지 주목할 만한 수정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후 약 103년이 지난 1947년 여름 (혹은 봄) 한 베두인 목동이 우연히 유대 광야에서, 오늘날 Cave 1로 명해진 동굴에서 양피지로된 두루마리들이 들어있는 항아리들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친구들 중 하나가, 그 양피지에 기록된 비슷한 글을 베들레헴에 있는 시리아 정교회에서 본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베두인들은 동굴에 있던 일곱개의 두루마리들을 가지고 나와 그 중 4개를 베들레헴에 있는 시리아 수도원에 약 98달러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를 받고 판다. 그리고 남은 3개는 베들레헴에 있는 고대 문서를 사고 파는 상인에게 판다. 그러나 시리아 정교회 수도원장은 그 이 두루마리의 진정한 가치를 알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시리아 정교회 중앙 본부에 넘긴다.


1948년 2월, 수도원의 도서관 담당 수도사가 그 두루마리들을 면밀하게 조사한 후,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계 고고학회인 올브라이트 학회와 J. Trever 박사와 연락을 취한다. 트레버 박사는 그 두루마리들을 보자 말자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을 알게 되고 사진 촬영을 허락 받는다. 촬영된 사진들은 미국에 있는 올브라이트 박사에게 전달된 후 그 두루마리들이 초기 기독교 당시에 기록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스라엘 독립전쟁 후에 4개의 두루마리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미국으로 전달된다. 그 후 이스라엘 고고학자인 이갈 야딘이 주도적으로 모금 운동을 벌여 그 두루마리들을 구입할 수 있었으며 1954년 6월 예루살렘에 있는 사해 사본관에 전시되었다.


첫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남은 3개의 두루마리에 관한 이야기는 더 흥미 진지하다. 유엔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워줄 것을 선언하기 바로 전날, 이갈 야딘의 아버지인 슈케닌 교수는 3개의 두루마리가 베들레헴에 있는 한 상인의 손에 넘겨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슈케닉 교수는 이 세개의 두루마리가 중요한 고대 문서임을 직감하고 바로 구입을 한다. 일화에 의하면, 슈케닉 교수가 베들레헴으로 가기 전날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아들 이갈 야딘에게 베들레헴 방문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야딘은 아들로서는 슈케닉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말리지 못하겠지만 군 사령관으로서는 반대한다고 말한다. 전운이 감돌고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이 베들레헴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케닉 교수는 변장을 한채로 베들레헴에 들어가서 3개의 두루마리를 구해온다.  1954년 7개의 두루마리가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중에는 이사야서와 하박국, 감사의 시, 공동체 규율서,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 사이의 전쟁, 창세기 외경들이 있다.


1949년 초 동 예루살렘의 에콜 비빌리코의 프랑스 고고학자인 Pere, R. de Vau와 요르단 고대 유물 관장인 L. Harding은 쿰란 제 1 동굴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본격적인 쿰란 발굴을 시작한다. 이후 1951년에서 1956년 사이에 쿰란 지역 발굴이 집중적으로 되었으며, 첫번째 발굴 기간이 끝날 무렵 하딩이 물러나고 폴란드 학자인 Milik가 드보를 도와서 발굴을 계속한다. 발굴 기간중에 총 11개의 동굴에서 문서들이 발견되었으며, 3번째 동굴에서는 동판에 기록된 문서가, 4번째 동굴에서는 수천 조각의 문서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4번째 동굴은 공동체의 도서관이나, 두루마리 보관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발굴 기간 동안, 철저한 방비를 하지 못한 관계로 베두인들에 의한 도굴이 계속되었다. 1956년도에는 베두인들이 11번째 동굴에서 "성전 두루마리"로 불리는 것을 도굴해 갔으며 이를 고대 문서를 파는 이에게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6일 전쟁 이후 이갈 야딘은 이 성전 두루마리를 구입하여 연구후 책으로 출간하였다.  1953년에는 와디 무라바아트에 있는 동굴에서 바르 코크바 봉기와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었고, 그중에는  시몬 바르 코시바 라는 봉기 주동자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도 있었다.


Reference:

http://www.antiquities.org.il/article_Item_eng.asp?sec_id=17&sub_subj_id=524#MM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