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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ish tradition & Yeshua

유대교는 선교 지향적 종교인가?




고대 유대교는 선교 지향적인 종교였는가? “선교적이라는 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는 아주 짧은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혀 선교적이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 전파를 가장 중요한 교의적 실천으로 여겼다. 초기 기독교 교리는, 이방 종교는 헛된 것이며 전혀 무가치 한 것으로 가르쳤고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가르쳤다. 주후 4세기경 로마 제국 정부가 기독교화 되었을때, 로마의 황제는 이방 종교를 근절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방 종교는 그 뿌리가 근절되었다.  이방 종교를 근절시키는 로마 정부의 정책은 다른 서구 유럽 지역에도 하나의 유산으로 남겨졌고 실행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세상의 어둠이 있는 곳에 파송되었고,  이방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보도록 하였다.


기독교의 선교 활동을 유대교에서 택한 적이 한번 있었다. 주전 2세기경 마카비 항쟁 이후, 하스모니안 왕가는 주변 국가의 유대교화를 추진하였다. 주후 1세기 경의 유대 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하스모니안 왕가는 이두메인들과 이두레인들이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였다. 한편, 로마 역사가 스트라보 (주전 64 – 주후 24)는 다른 관점으로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책을 평가하였다 스트라보는 당시 마카비 가문 (하스모니안 왕가)는 할례라는 의식을 통해 국가간의 연명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가 좀더 그럴듯 하게 보이지만 마카비 가문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주변 속국들과 동맹국들을 유대교화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유대교는 기독교처럼 선교 지향적인 종교는 아니었다. 성전의 제사장이나, 주후 1세기의 유대 분파들, 그리고 미쉬나와 탈무드의 랍비들도 이방인들을 개종시키고자 하는 단체를 만들거나 이방인들의 개종을 촉진하기 위한 그 어떤 학회들도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 2세기경부터 주후 1세기 말까지, 헬라어를 구사하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 흔히 이들은 헬레니즘적인 유대교라고 부른다 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선교 지향적인 종교적 성향을 지닌 유대교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외부인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유대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방인들을 환영하였다. 한편, 유대교는 선교 활동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 중 어떤이들은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에 대한 가르치을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유대 문학가들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우호적인 태도와 관심을 갖도록 하는 책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이 당시의 유대교는 선교 지향적인 종교였다.

 


살로 바론이 쓴 유대인의 사회 종교적 역사라는 책에는 유대 종교가 선교 지향적이었다는 것을 지지하는 내용이 있다.

비록 유대교에는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없었지만,  디아스포라 시대들을 통해 끊임없는 종교적 선전을 해왔다. 유대인들 중에는 순회 설교가들이 있었고, 유대의 언변가들은 도시와 도시를 떠돌아 다니면서, 유대 사상을 전파하였다. 신약 성서에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23:15). 틀림없이, 공식적으로 바리새파 지도자들 중에는 유대교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거나, 혹은 그 당시 개인적으로 유대교를 전파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


이런 바리새인들의 선교적 태도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고대 시대에는 다양한 유대교 분파들이 있었고 그 어느 것도 기준이 되거나 정통이라고 불릴만한 파는 없었다. 더 나아가 주전 2세기 중엽부터 주후 4세기 사이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가 된 이후 유대교에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개종이나 선교에 관한 유대교의 태도에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없다. 어떤 증거에 의하면 주후 1세기경 디아스포라의 몇몇 유대 분파들과 유대 사회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 선교 지향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기에, 그리고 유대교의 여러 분파들이 이방인들의 개종의 문을 열어 놓고 그들이 들어오는 길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예를 들어 유대교를 선교 지향적인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문학적인 증거들을 살펴 보면 유대교는 선교 지향적인 종교가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유대교가 선교 지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위에서 언급한 마 23:15 이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중 바리새인들이 개종자들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개종자들을 찾았을 것이다. 어쩌면 본문은 비유적으로 이해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분명하지 않다. 신약 성서의 다른 성서에서는 마 23:15에 나오는 선교에 열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을 역사적 사실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어쨓든, 본문의 내용이 과장되었다 할지라도, 이 본문은 유대인들 중에 선교적 정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구절로서 그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1세기 중엽,  유대 상인 아나니아스는 아디아베네 왕국의 왕자 이자테와 왕의 부인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당시 아디아베네 왕국은 티그리스 강 상부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작은 소국이었었다. 또 다른 유대인은- 아마 그 역시 상인이었을 것이다, 이자테의 어머니인 여왕 헬레나를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갈릴리 출신 엘리에제르라 불리는 유대인은 왕위를 이어 받을 이자테에게 개종과 할례받을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아마 엘리에제르는 순회 설교가이면서 상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예들은 적어도 개인적으로 유대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좋은 실례가 되기도 한다. 추측하건대 많은 아디아베네인들은 왕가를 따라서 유대교로 개종을 하였을 것이다. 여왕 헬레나와 그의 아들 이자테는 예루살렘의 웅장한 무덤에 장사되었다. 오늘날 헬레나가 직접 만든 예루살렘에 있는 그녀의 무덤은 왕들의 무덤이라고 잘못 불리고 있다.


주전 1세기경 로마의 시인 호레아스는,만일 그의 시를 읽는 독자가 그의 시에 대한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인들은 마치 유대인들과 같아서 독자를 우리들중 하나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라고 말했다. 종종 이 구절을 마치 유대 선교사들의 활동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호레아스가 의미한 바는, 당대 유대인들이 정치 활동의 폭을 넓히기 위해 로마 사회의 정치 후원자들을 얻고자 노력하였다는 것을 그의 시적 표현으로 빌려 쓴 것일 수도 있다.


주후 1세기 경, 벨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주전 139년경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추방을 당했는데 이는 유대교의 제의적 행위를 로마인들에게 전하려고 했기 뚠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의적 행위를 타락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후 1세기에 기록된 주전 2세기 경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유대교의 선교 활동을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이다.


3세기 초, 역사가 디오 카스우스는 주후 19년경 로마의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로, 유대인들이 본토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켰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몇몇 다른 학자들도 이 추방 사건을 기록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유대인의 선교 활동이 추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디오 카스우스가 옳든 그르든, 그는 유대 선교 활동을 그의 글에 언급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소수의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유대교의 선교 활동의 중요성처럼, 그러한 증거의 결핍 역시도 기대할 수 있다. 이집트, 시라아 그리고 소 아시아 지역의 유대인들이 선교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전무하다. 물론 바울과 그의 일행 그리고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방해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신약 성서의 기사들이 있지만 이들은  유대 기독교인들이었으므로 당시 유대교 혹은 디아스포라 유대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될 수는 없다. 유대교가 선교 지향적인 종교였다는 주장에 대한 일반적인 논쟁은 주후 1세기경의 많은 유대 인구와도 관련이 있다.


이테리에 있는 오스티아 혹은 아나톨리아의 회당은 유대교가 지중해 주변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주후 1세기경 당시 유대 지역을 제외하고, 로마 제국 인구의 약 10%는 유대인이었다. 주전 1세기경, 그리고 주후 1세기경 당시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로 개종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런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첫번째 주장에 의하면,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것을 유대인과 이방인이 큰 도시에서 함께 살았다는 것,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는 매우 존중받는 종교였다는 것에 근거를 둔 것이. 사실 초기 로마 제국내에서 유대교가 존중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선교 활동에 의해 개종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 견해가 더 타당하게 들린다. 일반적으로 스스로 타종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일반적으로 개종이란 일종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개인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를 제외하고 집단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경우의 증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불분명한 범주를 유대교의 선교 활동에 의한 결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번째 주장에 의하면, 당시 많은 유대 인구수에 대한 논쟁인데, 이것은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이 역시 단순히 유대 인구수를 숫자로 계산한 것일 뿐이다. 아돌프 하르낙에 의하면 초기 로마 시대의 유대 인구는 약 7%로 추정 된다. 한편 살로 바론은 약 10%의 유대 인구를 추정한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선교 활동 없이 어떻게 유대 인구가 그렇게 증가할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고대의 인구 계산 자체가 불분명한 것이다. 위의 경우에, 알렉산드리아의 철학가 필로가 언급한,  이집트의 유대 인구가 약 백만이었다는 것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혹 유대 인구가 백만에 근접한다 할지라도, 그 인구수 자체가 유대교의 선교 활동의 결과로 발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대 인구가 급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카비 항쟁 이후 하스모니안 왕가에 의한 주변 국가들의 유대교화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마카비의 정복을 유대로부터 로마 제국으로의 유대 디아스포라, 그리고 개종으로 결부시키는 것은 주후 1세기 당시의 유대교인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게된 이유가 될 수 있다.


유대교가 선교 지향적인 종교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 중 마지막 논쟁은 그레코- 유대 문학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헬라 시대의 유대 문학은 변증적이고 종교 선전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당시의 유대 문학은 반유대적인 사싱에 대한 반발과 당대의 문화를 향해 호감적인 시각으로  유대교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변증적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 볼때 유대교는 매우 선전적이었다. 유대교는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고, 혹 완전히 개종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유일신앙에 대한 이해 혹은 도덕적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문학이었다. 하지만 원래 그레코-유대 문학은 유대인과 유대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변증 문학은 이방인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유대인들을 설득하여 유대교에 충실하도록 만들고 주변 문화에 굴복하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윤리와 유일신앙에 중점을 둔 그레코- 유대 문학은 유대교내의 교육적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혹 헬라 유대 문학이 선교적 특징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방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한다 할지라도, 그 목적은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유대 문학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전 1세기에서 주후 1세기 사이의 유대교는 유대땅이나 디아스포라 된 땅에서나 선교 지향적인 종교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손에 의해 파괴된 후, 그리고 주후 115-117년 사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봉기가 처참하게 진압된 이후에도,  주후 132-135년 사이에 있었던 제 2차 유대 봉기에도, 기독교의 부흥 시기에도, 유대교는 많은 이방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종교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지속되었다 할지라도 유대교는 선교적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어느 곳에도 기독교 선교사들과 유대교 선교사들 사이에 개종자들을 얻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주후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일어난 반유대주의 운동은, 단 한번도 유대교의 선교 활동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4세기경 교회 교부인 요한 크리스트톰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화 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하지만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의 개종을 유혹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4세기에서 6 세기 사이에 유대교가 개종자들을 환영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대교가 선교 지향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 글은 아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Cohen, Shaye J.D. “Did Ancient Jews Missionize.” Bible Review, Aug 2003, 4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