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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2): 예수 시대의 갈릴리- 유대인의 도시? or 이방인의 도시?

예수님 당시 갈릴리 - 이방 문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가?

간략한 요약: 역사 요약, 그레코 로만 양식의 건축, 동전 주조, 유대인들 거주지를 알려주는 고고학적 특징들을 통해 예수님 당시 갈릴리를 조명하고 예수님 당시 갈릴리 유대인들이 이방 세계의 문화적 영향을 그리 많이 받지 않았음.

20세기에 들어서서 고고학자들이 갈릴리 발굴을 하기 이전, 사람들은 흔히 갈릴리는 시골 구석이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매우 놀랄만한 것들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사렛에서 약 6.5km 정도 떨어진 찌포리는 그리스, 로마 건축물과 그레코 로만 스타일의 목욕탕, 그리고 "갈릴리의 모나리자" 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등이 발견되었다. 모나리자 모자이크에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디아노수스 그리고 초청받은 이들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다른 유적지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이 발견됨에 따라 학자들은 새로운 정보로 인해 흥분을 하였고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를 재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갈릴리에서는 아람어 대신에 헬라어가 일반인들 사이에 사용되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레코 로만 스타일의 건축물에 새겨진 비문에는 황제들, 신들, 신화적인 영웅들이 매우 흔하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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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형상을 새겨넣지 않은 동전 - 이 동전은 헤롯 안티파스때 주조된 것으로 헬라어로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전에 살아있는 생물의 형상을 새겨넣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동전은 안티파스 통치 24년경인 기원후 20년에 주조된 것으로 갈대와 "티베리야스" 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로마 제국의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며 철학적 설을 푸는 냉소적인 철학자들과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연구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은 이방인들 - 헬라, 로마, 페니키아인, 아랍 혹은 다른 나라-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레코 로만 문화가 예수님 당시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지배적이지는 못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역 문화에 대한 연대 측정은 매우 주의할 필요성이 있는데, 시대별로 문화적 변화가 심하기 때문이다. 짧게 말해서, 예수님 당시 그레코 로만 문화가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많은 고고학적 발굴 연대측정을 통해 보는 갈릴리는 1세기경이 아닌 2-4세기경의 갈릴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갈릴리의 그레코 로만 문화 발전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발전 단계를 흩어볼 필요성이 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헬레니즘 문화와의 조우는 이미 알렉산더 대제가 팔레스틴을 정복한 (336-323 BC)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왕국은 포톨레미 (이집트와 남쪽 지역)왕가와 북쪽 지역의 셀루시드로 나누어진다. 지리적으로 중간에 끼어있는 팔레스틴은 중종 왕국들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모니안 왕가는 독립 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리니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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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3년, 폼페이와 하스모니안 왕가 사이의 충돌로 인해 유대의 독립 왕국은 그 막을 내리게 되고 로마 제국이 팔레스틴을 통치하게 된다. 당연히 로마는 그들의 문화를 갖고 들어왔고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의 희석된 문화적 영향으로 인헤 그레코 로만 문화를 양산하게 된다.

기원전 40년, 로마제국은 팔레스틴의 유대 나라를 다스리도록 새로운 왕을 임명하는데 바로 헤롯 대왕이다. 이 헤롯이 바로 베들레헴의 두 살이하의 아기들을 처참하게 학살한 인물이다. (마 2:16-18). 헤롯은 그레코 로만 문화를 팔레스틴과 동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지게 하는데 매우 열심을 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벗어나, 트리폴리, 다마스커스, 포톨레미아스의 경기장 건설과 시돈과 다마스커스의 연극장 건설에도 일조를 하였다. 팔레스틴에서, 그는 세바스테 (사마리아)와 가이샤라 마르티마 도시를 건설하였다. 가이샤라는 광장들, 원형 극장, 수로 그리고 연극장 등 모든 건축물들이 그레코 로만 스타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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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샤라, 세바스타 그리고 가리샤랴 빌립보에서 헤롯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로마의 여신 로마를 위한 신전들을 건축하였다 (예루살렘 유대인 성전을 재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헤롯의 건축은 갈릴리까지 확장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헤롯이 기원전 4년에 세상을 떠날때까지도 갈릴리는 그레코 로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헤롯이 죽자 그의 왕국은 분할되었는데, 그의 아들 안티파스 (혹은 헤롯 안티파스, 복음서에서는 헤롯 이라고 칭함)가 갈릴리를 다스리게 되었다. 안티파스의 통치는 기원후 3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예수님의 사역 시기가 그의 통치 기간중이었다.

비록 안티파스의 아버지는 갈릴리를 무시했지만 안티파스는 갈릴리 발전에 열심을 내었다. 그는 찌포리를 "오토크라토리스" 라는 명칭으로 바꿔었는데 이는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안티파스는 찌포리의 도로 건설과 직사각형 양식의 바실리카 건물, 수로등을 건설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찌포리의 연극장이 안티파스 통치때 건설되었다고 하고, 다른 학자들은 2세기 말엽에 건설되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1세기 말엽에 가서 찌포리에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며 로마식 공동 목욕탕과 새로운 수로 시설이 건설되었다고 본다.

찌포리와 함께 안티파스 당시 또 다른 중심 도시는 티베리야스 (디베랴)였다. 이 도시는 안티파스가 약 20년에 건설한 것으로 동시 로마 황제 티베리야스 (14-37년)의 이름을 따라서 도시이름을 지었다. 이 도시는 주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는데 현대 도시가 들어선 상태에서는 고고학적 발굴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발굴을 할 수는 없었다. 유대 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 1자 유대 봉기 (66-70년 (73년))때에 티베리야스에는 운동 경기장이 있었다. 아마 고고학자들이 이 경기장의 흔적을 찾은 듯 하다. 하지만 찌포리처럼 그레코 로만 양식의 건축물들의 시기는, 예를 들면 카르도 (로마식 도로)는 2세기경, 연극장 - 2-3세기, 그리고 목욕탕 - 4세기등이었다. (참조: 이는 예수님 당시 그레코 로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발견된 로마식 목욕탕 역시 2-3세기것으로 밝혀졌다. 유대 회당도 마찬가지이다. 그레코 로만 양식의 영향을 받은 회당은 4세기경에야 나타난다. 갈릴리 주변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스키토폴리스 (벧샨)에서 발굴된 원형 극장, 목욕탕, 레슬링 연습장, 신전등은 2세기 혹은 그 이후에 건축된 것들이다.

찌포리에서 발견된 2세기 혹은 그 이후 시대의 다른 유물들을 보면 사람, 동물, 신들, 판(Pan)과 포로메테에스(Prometheus)(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형상을 볼 수있다. 이러한 형상들은 1세기 갈릴리에서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것인데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형상을 새기거나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 참조).

이처럼 형상화된 예술의 연대기적 발전의 예들을 또 찾아볼 수 있는데 베이트 쉐아림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는 랍비 유다 하나시 -미쉬나의 편집자-가 장사되었다. 그의 무덤에는 동물들, 사람 그리고 신화적인 형상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역시 3-4세기경의 것들이다.

동전 이외, 예수님 당시의 유물로는 갈릴리 티베리야스에서 발견된 저울이다. 이 저울에는 헬라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 티베리야스의 영주 헤롯 34년, 시장 감독 가이우스 율리시스의 집무 기간..."

후대로 가면, 여러개의 글귀가 적힌 유물들이 찌포리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는 2세기 중엽의 저울도 있다. 헬라어 글귀가 적힌 유물중에는 디아노수스가 모자이크로 장식된 것도 있었으며, 베이트 쉐아림에서 발견된 거의 280개의 글귀가 적힌 유물들중 80%가 헬라어, 16%가 히브리어, 그리고 나머지는 아람어와 팔미레네어였다. 라틴어가 적힌 유물은 로마식 도로의 마일표석 (milestone)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연대기적으로 보면 후대로 갈수록 헬라어의 강세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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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전에 형상을 새겨넣는 것은 이러한 연대기적 발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기원전 2세기경의 하스모니안 왕가때 주조된 동전이 기원후 1세기 초반에도 사용되었다. 어떤 것은 동전에 히브리어 글귀가 새겨진것도 있지만, 다른 것들은 헬라어 글귀가 새겨진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뿔모양과 식물들이 새겨져 있지만 이방 도시나 로마 제국에서 주조된 동전들은 헬라어 글귀와 생물들이 동전에 새겨져 있다. 로마 황제의 화상이 동전에 새겨지는 것도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안티파스 시대전까지는 갈릴리에서는 동전이 주조되지 않았다. 안티파스때 주조된 동전은 헬라어 글귀가 새겨지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화폐제조 양식을 따르기 원하였지만 생물 - 신들, 동물들, 황제의 화상-을 동전에 새겨넣지는 않았다. 대신에 식물들, 예를 들면 종려나무를 새겨넣었다.

1세기 후반 찌포리와 티베리야스에서 동전이 주조될때도 역시 동전에 생물을 새겨 넣는 것을 피하였다. 따라서 갈릴리의 동전들은 2-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황제나 신들의 화상을 동전에 새겨넣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안 황제 (2세기) 당시 티베리야스에서는 황제의 화상과 제우스가 신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동전에 새겨 넣으므로써 갈릴리의 동전들은 다른 로마제국의 동전들과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결론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던 1세기 초반, 갈릴리에서는 그레코 로만 문화의 영향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 현상을 갈릴리 지역에 문화적 기후의 유입이라는 시각에서 봐야한다. 갈릴리는 그레코 로만 세계의 건축, 예술, 언어적 현상에서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갈릴리 자체의 문화에 그레코 로만 문화를 여과없이 흡수하지도 않았다.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을 통해 우리는 다음 세대에 갈릴리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다른 비숫한 질문들이 제기될 수있는데, 갈릴리의 사람들은 삶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유대인이었나 아니면 헬라인이었는가? 아무래도 그에 대한 답은 문화적 희석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고 일부 이방인들이 함께 공존하였다.

사복음서,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대 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은 일부 이방인들이 갈릴리에 살고 있었다고 증거하지만 그리 많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예를 들어 요세푸스는 제 1차 유대 봉기 (66-70 (73년)) 당시 티베리야스의 일부 유대인들이 소수의 이방인들이 사는 도시를 공격한다. 이와 비슷하게 마 8:5-13, 눅 7:1-10에서는 로마 백부장이 가버나움에 등장한다. 하지만 모든 자료들은 공통적으로 이방인들이 갈릴리의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고학적 발굴 역시 이를 지지한다. 3가지 고고학적 유물들이 갈릴리의 대다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음을 증거한다: 석회암 제질의 그릇, 미크베 (정결탕), 그리고 유골 상자들이다.

고대 시대의 대부분 항아리들과 접시들은 재질이 진흙이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식화암 제질의 그릇을 주로 사용하였다. 랍비들에 의하면, 석회암 제질의 그릇들은 유대 정결법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석회암 제질의 그릇은 부정함이 침투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릇에 액체들을 담아놓으므로서 제의적으로 부정케 되는 것을 방지할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요 2:1-11에 의하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고 온다. 짧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통 드는 돌항아리 ( waterpots of stone)에 물을 담아 연회장에게 갖가 주라고 하고 그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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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석회암 제질의 그릇들을 사용했다는 증거로 이 그릇들은 유대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이방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갈릴리와 그 주변 23개 장소에서 돌 그릇들과 그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1세기경에 사용된 정결탕 - 유대인들이 부정함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목욕탕 -이 찌포리와 요트파트에서 발견되었고, 63년과 135년 사이, 다른 갈릴리 마을들에서도 많은 정결탕이 발견되었다. 또한 가믈라에서도 1세기경의 정결탕이 발견되었는데 이 모든 정결탕은 유대인들의 거주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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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거주지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매장 방법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제 2차 매장을 하나의 관습처럼 행하였다. 죽은 사람을 매장한 후 약 1년이 지나면 살은 부패하고 뼈만 남게된다. 이 뼈들을 모아서 유골을 담는 함에 넣어 재 매장을 하는 것이다. 재 매장의 관습이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유골함은 석회암이 그 재질이다. 물론 개중에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유골함도 있다. 언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재매장 방법을 행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제 1차 유대 봉기 바로 직후에 재매장을 행하였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갈릴리에 이방인들이 거주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가? 적어도 1세기경까지는 이방신들을 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문들이 갈릴리 접경지역이나 혹은 갈릴리 내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신들이나 여신들의 동상도 없었다. 신들의 작은 입상 역시도 별로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갈릴리에서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이방 신전을 발견하지 못했다.

짧게 말해서,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주 거주민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갈릴리를 둘러싼 주변 지역은 이방인들이 주 거주민이었다. 예를 들면 스키토 폴리스 (벳샨), 히포스, 가이샤랴 빌리보, 북쪽의 게데쉬등은 이방도시들이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준 갈릴리 동쪽의 거라사 (마 8:28-34, 막 5:1-20, 눅 8;26-39)는 유대인들이 살았던 지역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일정부분 그레코 로만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 영향은 후세대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갈릴리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유대인들만의 고립된 지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이니다.

본 글은 Chancey, Mark. "How Jewish was Jesus' Galile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Jul/Aug 2007를 번역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