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ible Story

슈케닉 교수가 전하는 사해 사본 이야기

1947년 11월말 즈음,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 분할을 위한 투표 준비하고 있었다. 유엔의 투표 결과에 따라 2천년간 나라를 잃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운명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엔의 투표에 절대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고 중동 국가들 역시 유엔의 결정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치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세는 극도로 혼란한 상황으로 치달았고, 아랍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차디찬 냉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 슈케닉 교수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 교수: 11.5 1905 - 08.24.1978)는 베들레헴의 고대 물건을 파는 칸도에게 고대 문서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당시 베들레헴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은 아랍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유엔의 결정이 내려지게 된 후에 유대인이 그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기 때문이었다. 



사진: 제 4동굴입니다. (예루살렘 성지 대학 총장이며 저명한 사해사본 연구가인 스티븐 판 교수에 의하면 이 동굴은 일종의 "게니자 - 성서 문서들중 오래되고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보관하는 일종의 성서 무덤과 같은 것 - 역할을 하던 장소라고 합니다)


다음은 슈케닉 교수가 전하는 사해 사본을 구하게 된 이야기이다.  


11월 28일날 나는 미국인 친구 "나스리 오한"과 함께 칸도를 만나러 갈 계획을 세우지만  아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어쩔수 없이 나는 나스리 오한에게 전화를 걸어 그 계획을 취소하였다. 그 날 밤, 아들 이갈 야딘 (당시 이스라엘 군 사령관 - 훗날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 교수가 된다. 가브리엘 발카이 교수에 의하면 이갈 야딘은 고고학계의 마이더스의 손이었다고 한다. 그가 발굴하는 곳은 항상 중요한 유물들이 나왔기 때문이란다)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을때, 나는 그 양피지 두루마리에 대해 말을 했다, 아들은 역시 매우 흥분하지만 내 아내처럼  베들레헴에 들어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 후 다시 텔아비브로 돌아갔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 나는 유엔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을 알아보기 위해 라디오를 켰는데, 마침 유엔에서 투표를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투표가 진행되면 분명 아랍 지역에서 폭동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영 베들레헴에 있는 그 양피지 두루마리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야.  그 다음날 아침 일찍 (11월 29일) 나는 나스리 오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아내 모르게 나스리 오한과 함께 베들레헴을 향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버스 안에 유대인은 오직 나 혼자였고, 훗날 나스리 오한은 혹 그 버스안에서 죽을수도 있었겠다 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나는 바로 칸도의 가게를 향해 갔다. 아랍 전통에 의하면,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예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물론 나의 성격으로는 빨리 그 문서를 구입하고 싶었지만, 정중하게 그의 가족, 건강, 그리고 근황에 대해 물으면서 약 30분간 함께 차를 마셨다. 그 30분이 나에게는 일년과 같은 시간이었다. 



사진: 첫번째 동굴입니다.  바로 이 동굴에서  이사야서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차를 다 마신 후에, 나스리 오한이 드디어 문서 구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어떻게 베두인이 그 문서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칸도는 매우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사해 북쪽에 있는 쿰란 지역에서 양을 치던 베두인들이 양 한마리를 잃어버렸다.  그 양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헤매이다가 한 동굴을 발견하게 되어 그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는 양을 찾는 것이 급하였기 때문에 양을 찾으로 갔고 그 다음 날 다시 그 동굴로 와서 들어가 봤더니 한편에 5개의 항아리가, 다른 쪽에 3개의 항아리가 있었고 그 항아리들 속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들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베들레헴에 가면 그것을 팔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에게 와서 그 두루마리들을 팔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치고 칸도는 자신이 산 두루마리가 든 두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나와서 그게 무엇인지를 봐 달라고 했다. 처음 양피지를 보고 펴는 순간 나는 너무나 떨렸다. 몇몇 문장을 읽었는데, 분명 정말로 아름다운 성서 히브리어였다. 어쩌면 시편의 어떤 구절 같기도 했지만 내용 자체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순간 2천년간 감춰져 있던 히브리어 두루마리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사진: 첫번재 동굴을 다른 각도로 찍은 것입니다. 멀리 뒤쪽으로 사해가 보입니다. 


늦은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는 그날 밤에 유엔에서 땅을 양분하는 투표를 하게 될 것이라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나의 막내 아들 마티 (훗날 공군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독립 전쟁 당시 전쟁중에 전사하였다)는 건너 방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나는 2천년된 두루마리를 열심히 살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씩 내 방으로 와서 지금 투표가 어떻게 진행중인지를 알려 주고 가곤 했는데, 투표 결과는 자정을 넘겨서도 발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티가 문을 박차고 나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우리도 나라를 세울수 있게 되었어요 아버지!!!" 바로 그 순간 2쳔년간의 유량 생활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고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역사적 순간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2천년간 숨겨져 있었던 성서가 세상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엔의 결정이 알려지자 온 거리는 환영 인파로 순식간 뒤덮였다. 나도 방에 있을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찾았다.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기쁨과 함께 2쳔년된 성서 두루마리를 찾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던 그 순간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 본 글은 Past Perfect: Shall I Go to Bethlehem? (BAR 33:03, May/Jun 2007)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Bible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노라와 아몬드 꽃의 상징적 의미  (1) 2011.03.31
아몬드 (샤케드) 나무  (0) 2011.03.11
요셉 이야기 (2)  (0) 2010.12.29
요셉 이야기 (1)  (0) 2010.12.29
유대인(Jew)과 이스라엘인(Israelite)  (0) 201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