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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iary

웃는 예수 VS 웃지 않는 예수

      성화속에서 만나는 예수는 우울하다. 이스라엘에 있는 기념교회들을 방문해서 혹이라도 웃는 예수의 성화가 있나 찾아보지만, 실망스럽게도 예수는 웃지 않는다.  기독 서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예수의 초상화는 구릿빛이 감도는 얼굴에 찰랑 거리는 머리 그리고 오똑 솟은 콧날과 후광이 비치는 모습이다. 과연 성화를 통해 만나는 예수와 성서의 예수는 동일 인물일까? 가끔 혹은 자주 이런 엉뚱한 (?) 생각을 해 본다. 기존의 전통을 뒤집을 용기라든가 혹은 적당한 문헌적 근거를 찾을 수는 없기에 손들고 웃으시는 예수의 성화도 있던데…” 라고 말할수는 없겠으나, 이스라엘의 광야속에서 만나는 예수는 성화속의 예수외에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같다.


 

       웃음이 없는 예수는 성화뿐 아니라,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 역시 웃음과는 거리가 먼듯하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웃음에 인색한 것이었을까? 물론 목적 지향적인 성서내용이다 보니, 이런 주변적인 이야기까지 기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 읽기를 하다보면, 사역 중심의 예수를 만난다. 사역이라는 울타리속에서 예수 읽기를 하다보니 우리 스스로 예수의 모습을 성서의 세계속에 한정한다. 과거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히자 못하겠거든…(왕상 8:27)” 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성서속의 예수가 예수의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지는 않을 것이고 성서속의 예수께서 웃지 않으셨다고, 웃지 않는 예수의 상을 만드는 것도 성서의 세계속에 예수를 한정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들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 혹은 그 시대의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였겠지만, 은근히 그 웃음 없는 성화를 하얀 혹은 누런 (예수 당시에는 미백 치약이 없었으니) 이빨을 드러내고 호탕하게 웃는 예수로 성형을 해 버리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성서의 세계 밖에 계신 예수를 만나는 좋은 방법들중 하나는 그 분이 걸으셨던 광야의 길을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광야 걷기. 아마 기억으로는 3-4번정도 광야를 오랜 시간 (대략 7-10 시간 정도) 걸어보았다. 유대 광야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성서의 세계를 벗어난 예수의 삶을 입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광야 걷기를 하면서 만나는 예수는 성화속의 예수처럼 근엄한 표정이 없다. 광야속의 예수는 구릿빛이 감도는 빛난 얼굴이 아닌 검게 그을린 주름살이 있는 얼굴이다. 광야속에서 만나는 예수는 먼지 바람을 뒤집어 쓴 머리카락과 땀내가 풀풀 나는 옷을 입고 있다. 광야속에서 만나는 예수는 샌달 사이로 드러난 거친 발과 군살 박힌 발 뒤꿈치, 그리고 가시 덤불에 찔려 상처난 종아리와 먼지낀 발톱이 있는 분이다.

사진: 광야지기 

       태양이 그 파워를 가장 자랑할때인 지난 8월초 친구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광야의 계곡을 따라 7시간 정도를 걸은 적이 있다. 흔히 예수께서 걸으셨다는 길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메마른 광야의 계곡과는 달리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웅덩이들이 있다. 작열하는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도 있다. 이때가 바로 예수를 상상하기 좋은 시간이다. 아마 예수께서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실때마다 제자들과 함께 물과 그늘이 있는 그 계곡을 따라 걸으셨을 것이다. 예수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흔히 계곡을 따라 걸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뜨거운 태양을 몸에 안고 광야의 길을 걸었을리는 만무하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가끔 만나는 물웅덩이들은 광야의 나그네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잠시 쉬었다 간들 웅덩이가 뭐라 하지 않는다. 아마 예수께서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에 유대 광야의 계곡안 물 웅덩이가 있는 곳을 지나면서 제자들에게 옷 다 벗어! 우리 여기서 놀다 가자! 라고 하지 않았을까?” 무슨 불경건한 말인가 싶겠지만, 광야를 걸어보면 그런 상상이 전혀 엉뚱하지 않는듯 하다. 점잖게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선생인데, 너희들과 함께 물 웅덩이에 들어갈 수 있것냐?” 라고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날 나는 종이밖의 예수를 상상하면서 옷을 벗고 친구들과 함께 멱을 감았다. 마치 그 자리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하는듯한 상상의 나래를 펴가면서

 

       오래 전에 보았던 장미의 이름이라는 영화 생각이 난다. 영화는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 문제를 다룬 소설 장미의 이름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소설은 아프리카의 끝이라 불리는 방에 보관되어 있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 2희극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4세기는 자연과학과 르네상스 철학이 발달하고 있었고 기독교 경건주의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현실 세계의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을 대변하는 인간의 웃음은 르네상스 철학과 자연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로 여겼으니, 현세가 아닌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수도원 경건주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웃음이라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웃음문제는 연속 살인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만약 성서의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들이 있었다면 에코의 소설 내용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리고 중세 수도원의 음울하고 어두침침한 종교적 색채가 밝고 웃음이 절로 나는 색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사진: 성조지 수도원 (와디켈트) 

 

       “웃지 않는 예수 vs 웃는 예수의 상상에 대해 성서에 없는 것을 말한다고 혹자는 역정을 낼지 모르겟으나 어쩌면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를 신성한 너무나 신성한 예수의 상으로만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신의 아들 예수인듯 하지만 정작 그 분은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고 잔치를 즐기시는 분이셨다. 잔치 분위기를 근엄한 표정으로 썰렁하게 망치는 분이 아니라 없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물에 기적을 베푸신 분이셨다. 예수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나흘만에 무덤에서 살아 돌아왔을때 아마 예수께서는 그를 얼싸 끌어안고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즐거워 하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지만,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도 웃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이다. 다시 복음서를 펼치고 그 분이 행하셨던 한가지 한가지를 읽으면서 함께 예수의 웃음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그리고 웃음의 선물을 주신 그분께 감사하고 그 웃음을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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